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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2021년 2월 21일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
2021-02-21 13:01:44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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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 길을 묵상하며 신앙의 순례 길을 걷는 사순절 첫 주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배의 장소도 중요하지만 예배자의 마음이 더욱 중요합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영으로 마음 중심을 다해 예배드려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시하신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깨달아 아는 마음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곧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모습입니다.

 

예레미야는 남 왕국 유다를 향해 예언했습니다. 2장부터 25장까지는 12편의 예레미야 심판 경고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첫 번째 설교입니다. 유다 백성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고의적인 배교 배반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본문 앞서 1-3절에는 과거 광야 생활 당시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돈독했던 신뢰의 관계로 행복했었음을 회상합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3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8절에는 배도 배교 배신의 실상을 지적하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4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의 집 모든 족속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5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6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7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 8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

 

공의의 하나님이 더 이상 참으실 수 없을 만큼 그 백성의 배반이 뼈아프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 짐승(20), 행음하는 여인(20), 악한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21), 발 빠른 암 약대(23), 발정 난 암나귀(24), 붙들려 수치를 당하는 도적(26)’ 등으로 비유되는 유다 백성의 극심한 배반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하나님의 출애굽 구원을 받았습니다. 광야 생활에서 돌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을 삼아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축복으로 주셨습니다. 그 어느 민족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괴하여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우상 숭배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마저도 인위적인 방법으로 피해보려고 꾀를 내고 회피하려고 했습니다(3:1-5). 결국 심판의 경고를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적 타락, 전적 부패의 상태에 빠져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지 못하고 허무한 것을 쫓아가다가 결국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위해 새언약을 맺어주십니다.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1:31-34).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 구속사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은총을 기억할 때에 감사와 찬양이 넘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103:1-2).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첫째로 유다 백성의 죄는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를 팠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예레미야 17장에서도 ‘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14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17:13-14)

 

두 가지 악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스스로 터진 웅덩이를 팠습니다. ‘10 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 이같은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라 11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깃딤섬은 구브로 섬인데 유다 입장에서 보면 가장 서쪽을 말합니다. 그리고 게달은 팔레스타인 가장 동쪽에 사는 유목민인데 동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비록 우상을 숭배하지만 이방인들도 자기 신을 배반하지 않는데 참신을 섬기는 유다백성은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 그 백성의 심각하고 치명적인 죄를 예레미야는 냉소적으로 책망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사람의 마음이 근본적으로 모순에 빠져 있다면서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 반항적이고 낙담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는 죄를 범했습니다.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허무하고 무익한 우상을 숭배하는 배교 행위는 엄청난 죄악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하는 것은 우주와 역사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죄일 뿐만 아니라 절대 유일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신앙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다른 죄보다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 이것이 모든 죄의 근원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을 무력한 우상들 무익한 것들과 바꾼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결코 마르지 않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견주어 볼 때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도와줄 자로 스스로 우상을 선택한 것들은 물이 새는 웅덩이를 택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웅덩이는 빗물을 받아 모으려고 땅을 파고 진흙이나 석회 반죽으로 틈을 메워 만든 우묵한 곳을 말합니다. 그런데 터진 웅덩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밑 빠진 독입니다. 하나님을 버리면 밑 빠진 독 같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 아닌 것으로 하나님을 대체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대체불가입니다. 요한일서 521절에 결론으로 말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우상숭배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섬기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리 인생은 터진 웅덩이로 살 수 없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사마리아 수가성의 한 여인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는 듯 한낮 정오쯤에 우물가로 나왔습니다. 그 우물은 야곱의 우물이라고 불렸습니다. 수가라는 마을은 옛 세겜 근처에 있는 오늘의 아스칼로 추측됩니다. 그것은 야곱의 우물로부터 동북쪽으로 1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심산 허리 계단 밑에 있는 이 우물은 오늘날에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사마리아를 방문하셨습니다. 부정한 과거를 지닌 여인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자각하게 하셨습니다. 마침내 영적 기갈을 해소할 생수가 예수님 자신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여인은 갈증을 느끼는 여인이었습니다. 터진 웅덩이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은 그런 물을 내게 주소서요청합니다. 물은 야곱의 우물에서 나오는 자연수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인간의 욕구를 채워주는 재물 명예 지식 권력 쾌락 그리고 사마리아인의 종교 경전이었던 모세오경 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순간적 갈증해소가 아니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여인은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물 길러 오지 않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십니다. 예언적 통찰력으로 여인의 진짜 갈증을 드러내십니다. 죄책감 죄의식을 자극함으로 영혼의 갈증을 일깨워주시려고 하십니다. 그 여인에게는 남편이 문제였습니다. ‘내게 남편이 없나이다’(우크 에코 안드라). 앞서 길었던 여인의 말이 갑자기 세 마디로 줄어듭니다. 은근히 남편을 감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네게 남편이 다섯 있었으나 지금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남편(아네르)은 남자를 의미합니다. 다섯 번 결혼했는지 다섯 남자와 살았는지 불분명하지만 지금의 남편도 남편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인의 갈증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리겐 교부는 다섯 남편을 모세 오경이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사마리아에 있던 이방 앗수르의 다섯 도시에서 섬기던 우상을 말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우상적인 남편을 버려야 참 남편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뭔가 허전해.’ 이게 우물가의 여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세상 모든 사람이 살다가 한 번쯤 아니 수없이 많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뒤에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뭔가가 빠졌다는 허전함이었습니다. 그 뭔가는 바로 옷이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3:7). 사실 그들은 창조 이후로 쭉 벌거벗고 살았지만 죄를 지은 뒤에야 벗은 것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 변했을까요? 성 어거스틴은 그 답을 정확히 짚었습니다. 죄를 짓기 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그 사랑을 벗고 나서 그들은 발가벗겨진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뭔가가 잘못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완벽히 안전하다는 느낌에서 벌거벗고 있다는 두려운 느낌으로 변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최대한 빨리 몸을 가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벌거벗음에 대한 아담과 하와의 반응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영혼이 벌거벗겨진 기분을 느끼면 우리 삶은 자존감과 안정감, 사랑받는 느낌을 다시금 제공해줄 을 찾아 끝없이 찾아 헤매게 됩니다. 관계 재물 명예 권력 업적 등이 그런 옷입니다. 아무리 그런 옷을 갈아입어도 그 옷들은 입은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입어야 할 것을 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옷 입어야만 안전하고 만족하게 됩니다.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이 점을 정확히 지적했습니다. ‘한때 인간에게는 참된 행복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행복의 공허한 흔적만 남아 있다.…… 이 무한한 심연은 오직 무한하고도 변함없는 대상, 즉 하나님으로만 채울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마음에 하나님만한 크기의 구멍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가족, 성공, 연애, 우정, 여행, 명예, 마약, 쾌락까지 우리가 하나님을 대체하려는 모든 것은 우리를 더 허전하게 만들 뿐입니다. 잠시는 행복에 가까워진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결국 갈증만 더 심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다섯 남편을 둔 여인이 그랬습니다. 뻥 뚫린 하나님의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아니고서는 결코 안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있어도 하나님의 자리를 채울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성경은 우상 숭배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영혼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안고 살고 있습니다. 텅 빈 웅덩이로 살수는 없습니다. 다섯 남편도 소용없습니다. 그 빈곳 그 갈증은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그 빈 곳은 오직 주님으로만 채울 수 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2:13). 우리는 기쁨이 끝없이 흘러나오는 샘과 같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생수를 보관할 수 없는 터진 웅덩이들로 눈길을 돌렸던 것입니다. 당시 웅덩이는 빗물을 모으기 위해 돌로 쌓은 작은 저수조였습니다. 그런데 대개 물이 새어서, 모아 둔 물이 결국은 다 빠져나갔습니다. 예수님은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한 망가진 여인의 삶을 통해 예레미야의 이 비유를 설명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터진 웅덩이로 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으로, 예수님 말씀으로, 주의 성령으로 채워야 합니다. 갈증은 목말라 죽게 만듭니다. 오직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으로 영혼의 가슴을 채우십시오. 영원한 생명수로 갈증을 채워 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남편 문제로 궁지에 몰린 여인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합니다. 그리고는 예배 장소 문제를 들고 나옵니다. 예배 처소에 대한 갈등은 남왕국 북왕국이 분열되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1차 포로귀환 시 스룹바벨이 성전을 재건할 때 사마리아인들이 함께 건축에 참여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함께 하기를 거부했습니다(4:1-6,4:1-2). 그 후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 자신들의 성전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곡해해서 이삭을 바친 곳, 신명기 28장의 축복이 선언 된 곳, 아브라함과 야곱이 단을 쌓았던 곳이 그리심산이라고 해석해서 그곳에 성전을 세웠습니다. 그 때가 주전 322년경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그리심산 성전은 약 200동안 같이 존속하며 심한 갈등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심산 성전은 주전129년 하스모니안 왕조의 힐카누스에 의해 파괴됨으로 외형적인 성전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축복의 산으로 여겨졌던 그리심산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기도 장소로 남아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은 여인이 예수님께 예배 장소에 대해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예배를 받으시는 대상 하나님께 집중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 오경만을 믿는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불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배의 대상을 알지만 그 대상이 누구신지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대인의 예배는 형식적이고 신령한 것이 되지 못했고 사마리아 인의 예배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서 벗어났음으로 진리 진실한 예배가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영과 진리로(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 ‘바람에서 유래한 단어 프뉴마’ ‘영혼’ ‘마음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예배자의 자세가 인간 내면 깊숙한 곳 영으로 또는 마음의 중심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알레데이아)숨김이 없는 상태’ ‘어떤 일을 깨달아 아는 것’ ‘하나님의 뜻을 잊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숨기지 않고 사실을 정확하게 깨달아 알며 하나님의 뜻을 잊지 않고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을 향해서는 영으로 예배하라는 것이고 사마리아인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본질을 잘 알고 예배드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행복해지는 길은 하나뿐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길은 바로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예배를 원하신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을 으로 알고 그분을 삶의 주된 근원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하나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일한분이기를 원하십니다.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실 뿐 아니라 그분께 무엇도 숨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벌거벗겨져야합니다. 하지만 우물가 여인처럼 여기에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치부까지 다 아신다면 우리를 과연 받아 주실까요? 예수님은 이 여인의 죄와 공허함을 철저하게 드러낸 뒤에 몸을 돌려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이 여인은 죄인이었음에도 그분 안에서 안전했고, 그분을 통해서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확보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모든 수치와 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면 어떻게 될까요?’ 답은 안전하다입니다. 사실 그곳이야말로 우주에서 유일하게 안전한 곳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도 하나님이 사해주시고 하나님의 의를 입혀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우리 영혼을 드러내면 그분이 우리를 받아 주고 용서하고 깨끗이 정화하고 구원해 주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원한 사랑에서 우리 영혼이 내내 찾아왔던 생수의 근원 우물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배드리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예배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를 파지 마시기 바랍니다. 터진 웅덩이로서는 갈증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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