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모음
1. 8 유다의 왕 아사랴의 제삼십팔년에 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가 사마리아에서 여섯 달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9 그의 조상들의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10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그를 반역하여 백성 앞에서 쳐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11 스가랴의 남은 사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12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네 자손이 사 대 동안 이스라엘 왕위에 있으리라 하신 그 말씀대로 과연 그렇게 되니라 13 유다 왕 웃시야 제삼십구년에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한 달 동안 다스리니라 14 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디르사에서부터 사마리아로 올라가서 야베스의 아들 살룸을 거기에서 쳐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15 살룸의 남은 사적과 그가 반역한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16 그 때에 므나헴이 디르사에서 와서 딥사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사람과 그 사방을 쳤으니 이는 그들이 성문을 열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그들이 그 곳을 치고 그 가운데에 아이 밴 부녀를 갈랐더라 17 유다 왕 아사랴 제삼십구년에 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십 년간 다스리며 18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19 앗수르 왕 불이 와서 그 땅을 치려 하매 므나헴이 은 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어서 그로 자기를 도와 주게 함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하여 20 그 은을 이스라엘 모든 큰 부자에게서 강탈하여 각 사람에게 은 오십 세겔씩 내게 하여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니 이에 앗수르 왕이 되돌아가 그 땅에 머물지 아니하였더라 21 므나헴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2 므나헴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23 유다의 왕 아사랴 제오십년에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 년간 다스리며 24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25 그 장관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반역하여 사마리아 왕궁 호위소에서 왕과 아르곱과 아리에를 죽이되 길르앗 사람 오십 명과 더불어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었더라 26 브가히야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27 유다의 왕 아사랴 제오십이년에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이십 년간 다스리며 28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29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30 웃시야의 아들 요담 제이십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반역하여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쳐서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31 베가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32 이스라엘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 제이년에 유다 왕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니 33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루사라 사독의 딸이더라 34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35 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 36 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37 그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 38 요담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 다윗 성에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2. 나라가 멸망하는 결정적 원인 제공은 항상 군주의 리더십 붕괴다. 아무리 화려한 제국도 인간과 같아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쇠락하고 죽는 필연적 코스를 가게 되어 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국가도 예외는 없다. 여로보암 2세의 통치하에 왕조 역사상 최고의 절정기를 누렸던 이스라엘. 동시대에 남쪽유다는 아마샤 왕의 교만으로 예루살렘 성전까지 유린당하는 비참한 지경에 빠졌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대조적이다. 그러나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된다더니 세월이 흘러 양국의 왕들이 바뀌면서 이번엔 정반대의 상황이 전개되었다. 남쪽의 유다 왕국은 10대 왕 웃시야(아사랴)의 52년간에 걸친 통치기간 동안 다시 국력이 안정되고 상당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왕국은 여로보암 2세가 죽은 뒤 약 30여 년 동안 무려 6명의 왕들이 왕위 쟁탈전을 벌였고, 그 중 5명이 심복에게 살해되는 대혼란의 정국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남쪽 유다보다 정확히 136년이나 먼저 주전722년에 멸망하고 만다.
3. 북이스라엘의 14대 왕 스가랴는 예후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는 군주로서 단 여섯 달밖에 왕위에 있지 못했다. 스가랴는 자신의 선대왕들과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여 하나님과 심복들로부터도 버림당하게 된다. 그의 말로는 비참했다. 살룸이라는 신하가 반역을 했는데 살룸은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백주 대낮에 왕을 참살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왕을 죽이고도 살룸이 별 문제 없이 새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스가랴가 그만큼 실정(失政)으로 민심을 잃었다는 얘기가 된다. 즉, 왕의 암살은 국가의 비극이 아닌 그의 실정에 대한 백성들의 공개적 심판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성경은 이 스가랴의 비참한 최후와 예후 왕조의 몰락이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임을 분명히 한다.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네 자손이 이스라엘 위를 이어 사 대까지 이르리라 하신 그 말씀대로 과연 그렇게 되니라’(왕하15:12). 우리는 예후 왕조가 시작되기 전 이스라엘의 시조 여로보암이 세상을 떠난 뒤 30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군주들이 연달아 최측근 신하들에게 살해당하고 그 와중에서 이스라엘의 왕조가 4번이나 바뀌는 혼란의 시대가 있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스가랴의 죽음으로 예후 왕조가 무너지면서 다시 그와 똑같은 피의 역사가 이스라엘 왕조에서 재현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스가랴 이후에도 이스라엘이 망하기까지 5명의 왕들이 더 들어서지만, 사실상 스가랴의 죽음과 함께 이스라엘의 제대로 된 왕정은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후부터 들어서는 스가랴의 후계자들은 사실 왕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민망한, 거의 폭도와 같은 인물들뿐이었기 때문이다.
4. 북이스라엘의 15대 왕 살룸. 선왕을 공개적으로 살해하여 왕위에 오른 그도 단 한 달밖에 왕좌에 앉아 있지 못했다. 디르사 출신의 므나헴이라는 인물이 수도 사마리아로 올라와서 살룸 왕을 살해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살룸 자신이 뿌린 죗값을 치른 것이다. 성경은 살룸이 스가랴를 ‘모반한 일’(왕하15:15)이라고 기록한다. 즉 살룸이 스가랴를 살해한 것은 자신의 탐욕 때문이었다는 의미다. 물론 스가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섭리는 어떻게든 행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왕을 함부로 시해한 살룸의 탐욕에 찬 살인이 묵과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악한 권력이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력을 상대로 하나님의 지시 없이 함부로 칼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 다윗은 자신을 그토록 집요하게 죽이려 하던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자신이 죽일 수 없다며 죽이지 않았다. 결국 사울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게 되지만 다윗이 그 전에 함부로 개인적인 원한으로 칼을 휘둘렸다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를 샀을 것이다. 하지만 살룸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일개 무부(武夫)에 불과했고, 그리하여 자신도 재위 한 달 만에 측근의 손에 암살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5. 북이스라엘의 16대 왕 므나헴은 살룸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새 왕이 된 므나헴은 예후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던 스가랴 왕의 장군으로서, 북이스라엘의 초기 수도였던 디르사의 군사적 통치자였다. 므나헴은 살룸보다 더한 잔혹한 인물로서 권력을 잡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나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반란군을 이끌고 사마리아로 진군하는 과정에서 성문을 닫고 저항하던 딥사란 곳에 이르렀을 때 므나헴은 이 딥사를 무자비하게 공격한 뒤 성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므나헴의 군대가 얼마나 잔인했는지 임산부들의 자궁까지 베어버리는 짐승 같은 횡포를 저질렀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이런 무자비한 폭력으로 므나헴은 왕이 된 후 대내적 적대 세력을 평정하며 정국을 안정시켰다. 동시에 그는 당시 중동 세계 전체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군사 강국 앗수르의 제왕 디글랏빌레셀(B.C. 745-727)에게 조공을 바침으로써 앗수르의 칼날에서 이스라엘을 지키려고 했다. 고고학자들이 앗수르 왕의 궁전에서 발굴한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디글랏빌레셀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아람이나 두로 등 주변 국가들로부터도 막대한 조공을 받았던 것 같다. 단순히 전쟁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외교와 경제 심리전에도 능통했던 디글랏빌레셀은 이렇게 칼 한 번 안 휘두르고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앗수르는 조공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누림과 동시에 상대 국가들에게는 경제적 타격을 줌으로써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았다. 또한 그 과정에서 앗수르 왕은 약소국 왕들이 자신의 앞에서 무릎 꿇고 덜덜 떠는 것을 즐기는 고약한 습성이 있었던 것 같다. 고대 앗수르 궁정의 연대기에는 디글랏빌레셀이 이스라엘 왕 므나헴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다. ‘므나헴에 대해서 말하건대, 짐이 그를 눈보라처럼 위협하니 그가 한 마리 새처럼 꽁무니를 빼더니 내 발 앞에 무릎을 꿇었도다. 짐이 그를 다시 그의 자리로 되돌려 보내고 짐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하였노라.’ 상상만 해도 극심한 치욕이다. 유달리 외침을 많이 당했던 한국의 제왕들도 이와 비슷한 굴욕을 많이 겪었는데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저 유명한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이다. 병자호란에서 패한 인조가 1637년 1월 남한산성을 나와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 꿇고 항복한 사건이다. 이때 청의 강요로 세운 ‘대청황제 공덕비’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한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의 왕 앞에 무릎 꿇고 자비를 구하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런 일인지는 아마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앗수르 역사에 므나헴 왕은 그렇게 수치스럽게 기록되었다. 딥사의 자기 동족들과 선왕을 처참하게 학살하면서까지 왕좌에 오른 므나헴은 자기보다 훨씬 강한 앗수르의 왕 앞에서는 이렇게 비굴한 모습으로 무릎 꿇고 만다. 폭력은 더 큰 폭력 앞에서는 한없이 비굴해지는 법이다. 므나헴은 단순히 돈만 바친 것이 아니었다. 한 나라 지도자로서의 자존심과 영광이 모두 땅에 떨어져 짓밟힌 셈이었다. 하나님을 버린 인간은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전락한다. 므나헴이 앗수르에게 바친 돈은 은 1천 달란트, 요즘 돈으로 치면 2천억은 족히 되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이 많은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국내의 유지들로부터 기부금 형태로 억지로 거두어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강제로 백성들로부터 돈을 토색하여 적에게 바쳐 수치스런 평화를 얻어 낸 므나헴을 하나님은 가만두시지 않았다. 선지자 호세아를 보내 무서운 경고와 책망을 하셨다.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호5:13)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호7:11) ‘6 그 송아지는 앗수르로 옮겨다가 예물로 야렙 왕에게 드리리니 에브라임은 수치를 받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계책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7 사마리아 왕은 물 위에 있는 거품 같이 멸망할 것이며’(호10:6-7). 이런 환난이 오면 거기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정석이다. 그런데 므나헴은 인간적 수단과 방법으로 당장 위험한 상황만 모면하고자 했으니 목마르다고 양잿물을 마셔 버린 셈이었다.
6. 북이스라엘의 17대 왕 브가히야는 므나헴의 아들로 왕위에 올라 역시 시조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는 악행을 계속 저질렀다. 이 때문에 브가히야는 재위 2년 만에 역시 부하에게 배신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브가히야 정권의 장관이었던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쿠데타의 주역이었다. 베가는 그때 이미 요단강 동편 지역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상당 부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10년이 넘도록 착실히 세력을 키워 오던 그가 마침내 왕을 시해하고 국가의 전권을 장악하기로 결단한 것이다. 베가는 50명의 길르앗 용사들을 이끌고 사마리아 왕궁 호위소에서 왕의 일행을 습격했다. 왕궁 호위소는 왕궁에서도 높은 곳에 위치한 요새화된 성채로서, 그래도 가장 보안이 잘된 안전한 곳이었다. 그런데 브가히야는 전혀 예상치 못하게 바로 그 곳에서 자객들의 칼을 맞은 것이다. 당신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 천혜의 요새에 수많은 경호원들이 지켜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을 거역한 제왕이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곳은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없다. 브가히야의 비참한 최후는 어쩌면 아버지 므나헴이 왕위를 찬탈할 때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홀린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죄 없이 죽은 아벨의 피가 땅속에서 호소하듯 무고한 피를 함부로 홀린 사람의 가문은 반드시 언젠가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7. 브가히야를 암살하고 이스라엘의 18대 왕이 된 베가(B.C. 740-732)는 8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된다. 열왕기하에는 베가가 20년을 다스렸다고 되어 있는데(왕하15:27), 이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때가 B.C. 722년이었던 사실과 유다의 요담 왕 재위 20년에 그가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왕하15:30) 사이에 모순이 생기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은 베가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호세아가 유다 왕 아하스 재위 12년에 이스라엘 왕이 되어 9년을 다스리다가 나라가 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왕하17:1). 거기다가 앗수르 측 사료(使料)에는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의 재위 기간이 18년이었고, 처음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의 이스라엘 왕이 브나히야의 아버지 므나헴이라고 되어 있다. 이런 여러 사실들을 참고해서 정리해 보면 베가는 처음 12년 동안 요단 동편을 부분적으로 통치하다가 서서히 이스라엘 전체를 장악하여 정식 왕으로서는 8년간 다스렸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듯싶다. 베가는 그의 경력이 보여 주듯이 군대를 양성하고 움직이는 리더십이 뛰어나고, 나름대로 배짱과 전략이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대담하게 앗수르에 대항하는 적대 노선을 지향했다. 이를 위해 이때까지 원수처럼 싸웠던 아람 왕 르신과도 동맹을 맺었다. 이 연합전선에 유다도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유다는 이 제의를 거절한다. 이에 분노한 베가는 유다를 어떻게 해서라도 반앗수르 동맹에 끌어들이기 위해, 아람과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한다. 그러나 그것은 장차 이스라엘 전체의 멸망을 불러올 치명적인 실수였다. 우리는 이미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유다 왕 아하스가 앗수르에게 뇌물을 바치며 도움을 청한 사실을 다룬바 있다. 이에 앗수르왕 디글랏빌레셋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군을 움직여 이스라엘 정벌을 단행한다. 수많은 전쟁에서 단련된 앗수르의 정병들은 들판을 까맣게 덮으면서 몰려왔다. 순식간에 이스라엘의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휩쓸어 버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포로가 되었는데, 포로가 된 이스라엘인들 중 귀족, 기술자, 청년, 젊은 여인들은 모두 앗수르로 끌려가고 말았다. 국제 정세를 잘못 읽은 판단 착오로 베가는 나라를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것이다. 성난 민심은 이미 그를 떠난 지 오래였고 자괴감에 빠진 그의 리더십은 이미 빠져나오기 힘든 레임덕 현상으로 접어들었다. 거기다가 앗수르도 자신들에 대항한 이스라엘의 이 괘씸한 왕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친앗수르 정책을 펼칠 새 왕을 세우기 원했다. 마침내 민심과 강대국 앗수르의 은밀한 지원을 등에 업은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일어나서 베가를 죽여 버린다. 결국 베가도 자기가 했던 똑같은 방법으로 권좌에서 끌어내려진 것이다.
8. 호세아(B.C.731-722)는 앗수르 왕의 후광으로 왕위에 오른 북이스라엘 최후의 왕이다. 선지자 호세아와 혼동하지 말자. 그가 왕위에 있었던 10년은 북이스라엘이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비참한 시간이었다. 반(反)앗수르 정책을 펼쳤던 베가를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호세아는 처음 9년 동안은 앗수르에게 착실히 조공을 바치면서 자신의 권세도 유지하고 나라도 지켰다. 성경은 또 그가 악하긴 했어도 선대왕들처럼 심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 시대에 나라의 멸망이 왔다. 다른 지도자들보다 좀 낫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리더십의 진정한 평가는 다른 왕들과 비교하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에 따라 이뤄진다. 자신과 백성들이 확실한 회개와 방향 전환을 하지 않으면 심판을 막을 수 없다. 멸망의 원인은 호세아 왕 자신이 제공했다. 앗수르의 영광을 이뤄 낸 카리스마적 정복자 디글랏빌레셀이 죽자 호세아는 생각을 바꾸었다. 천하의 디글랏빌레셀이 없는 앗수르는 이제 더 이상 옛날 같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제야말로 오랜 세월 앗수르에게 당한 설움에서 해방될 때라고 여긴 호세아는 먼저 앗수르에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는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물론 호세아도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중동에서 유일하게 앗수르를 견제할 수 있는 강대국 중 하나였던 애굽의 소 왕에게 사신을 보내 새로운 후원자가 되어 달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애굽은 사분오열 춘추전국시대처럼 수많은 군소 영웅들이 난립하여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소 왕은 그 어지러운 국내의 헤게모니 쟁탈전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지도자였다. 그렇게 자기 앞가림도 하기 어려운 처지의 애굽이 멀리 떨어진 이스라엘을 돕기 위해 저 무서운 앗수르와 싸울 여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호세아는 완전히 썩은 동아줄을 잡은 것이다. 줄을 잘못 선 호세아는 자신과 나라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된다. 호세아의 이 급작스런 친애굽 정책은 앗수르의 새 왕 살만에셀을 격분시켰다. 몰려온 앗수르의 대군은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3년간 포위했다. 호세아의 전령은 말발굽에 불이 나도록 애굽으로 달려갔지만 기대했던 애굽에서는 아무런 원조도 오지 않았다. 사마리아 포위 작전 도중 앗수르의 살만에셀 왕이 원인 모를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지만 곧 그의 형제인 사르곤 2세(B.C. 722-705)가 왕위를 이어받아 사마리아 공격을 계속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는 별 도움이 안 되었다. 마침내 기력이 다한 호세아 왕이 백기를 들면서 사마리아가 함락되었다. 이리하여 약 210년 전 여로보암이 세웠던 북이스라엘 왕국은 마침내 멸망당하고 만다(주전722년).
9. 패망국의 백성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가혹했다. 이미 수차례에 걸친 앗수르 침입 때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지만 나라가 망하면서 또 거의 3만 명에 달하는 포로들이 앗수르로 끌려가게 된다. 열왕기하 17장에서 ‘사람을 옮겨다가’(왕하17:24)라고 한 것은 당시 앗수르의 식민지 이주 정책을 말한다. 앗수르는 피지배민들을 포로로 잡아가서 자신의 영토 전역에 흩어 버리고 대신에 정복지에는 자신의 백성을 대거 이주시킴으로써 정치적 인종적 분란을 사전에 방지했다. 앗수르의 통치 시스템은 점령지인 속국에 왕 직속의 총독을 파견하는 제도였다. 특히 앗수르는 피정복민의 반란을 방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반역할 가능성이 높은 지방의 주민을 모아서 멀리 딴 곳으로 이주시켜 버리는 강제 이주 정책이었다. 유대인들처럼 강력한 민족성을 가진 백성들의 응집력을 깨어 버리고 고향 땅에 대한 애착을 갖는 애국심을 자손 대에 가서는 아주 말살시켜 버리겠다는 의도였다. 지배자 쪽에서는 매우 효과적인 정책이었는지 몰라도 당하는 백성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었다. 이제까지 쌓아온 생활 기반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반란을 일으킬 만한 여력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 한국의 현대사에도 이와 같은 아픈 기억이 있다. 1937년 스탈린이 17만이나 되는 조선인들을 극동 지역에서 수백 킬로나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강제 집단 이주시켜 버린 사건이다. 그 일을 통해 얼마나 처절한 까레이스키들의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었던가? 가족 친지들끼리 서로 생이별을 당하고 먼 길을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며 끌려가다가 죽어 나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멸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 그와 비슷한 혹독한 운명이 불어 닥쳤던 것이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앗수르 영토 곳곳에 흩어서 이주시킨 뒤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로는 다른 이방 족속들을 대거 강제 이주시켰다. 이것은 2가지 불행한 결과를 낳았는데, 첫째는 이렇게 이주해 온 이방인 족속들과 토착 이스라엘인들이 어쩔 수 없이 많이 결혼함으로써 인종이 섞이게 된 것이다. 단일민족의 순수성을 목숨보다도 중시하는 유대인들에게는 대단히 치욕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일은 훗날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두고두고 큰 내분의 원인이 된다. 둘째는 종교의 혼합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우상신들도 고스란히 사마리아로 가지고 와서 섬겼는데 그러면서 동시에 앗수르 왕실에 한 가지 희한한 청을 넣었다. 포로로 잡혀 온 북이스라엘의 제사장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종교도 가르쳐서 활성화되게 해 달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처음 그들이 사마리아 지역으로 이주해 와서는 아무 갈등 없이 자신들이 가져온 우상들을 섬겼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 중 몇 사람을 죽여 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왕하17:25). 경악한 그들이 나름대로 원인 분석을 해본 결과 이것은 이 지역의 신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무시한 결과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당시 사람들은 각 나라마다 그 나라의 수호신 혹은 지방 신이 있다고 믿었고 일단 그 나라에 오면 그 신들에게 합당한 존경을 표해 주지 않으면 재앙을 받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이 가지고 온 우상 신들은 우상 신대로 믿으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지역의 하나님도 예배하게 함으로써 양쪽이 다 좋게 하자는 실용주의적 발상을 하게 되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사마리아 지역은 인종이 혼합되었을 뿐 아니라 종교도 혼합되어 버리는 불행한 땅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리하여 훗날 유대인들은 포로 생활이 끝나 귀환했을 때도 사마리아인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고 이 같은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반목은 예수님이 태어나시던 무렵까지도 계속되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도 그 생명이 오래 가질 못했다. 앗수르의 공포정치는 결국 많은 주변 국가들의 원망을 사고 피정복인들의 저항 의지만 불태웠다. 결국은 신바벨론과 메데 왕국의 연합군에게 앗수르도 얼마 못 가서 비참하게 멸망당하게 된다.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하는 법이라더니 전쟁의 화신으로 불리던 군사 강국 앗수르가 더 지독한 강적들에게 당한 셈이 됐다.
10. 북이스라엘은 왜 망했을까? 열왕기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멸망 사건을 기술한 뒤 이스라엘이 왜 멸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하지만 직접적인 설명을 하기 전에, 열왕기의 저자가 이때까지 충분히 간접적으로 강조한 첫 번째 이유부터 짚어 보자. 그것은 잘못된 시작에서 비롯된 왕들의 파탄이다. 북이스라엘의 왕들의 경우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시조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기록이 거듭 반복된다. 250년이란 긴 시간 동안 19명이나 되는 왕들이 모두 여로보암이 잘못 닦아 놓은 왕조의 리더십 패턴을 벗어나질 못한 것이다. 처음 길을 닦는 사람의 역할이 이렇게 중요하다. 자식은 아비의 잘못부터 먼저 자연스럽게 닮아 버린다고 한다. 아버지의 죄악은 자손의 미래를 가두는 보이지 않은 감옥과도 같다. 여로보암의 후대 왕들은 그 죄의 감옥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여로보암은 설마 자신이 뿌린 잘못된 씨앗이 후대 왕들에게까지 계속 이어져 나라를 파멸시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로보암으로부터 시작되어 계속해서 다음 세대 왕들이 반복한 그 무서운 죄는 무엇이었을까? 열왕기서 기자는 주저 없이 그것은 우상숭배였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계명의 첫 번째가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우상숭배 금지령이었다. 결코 그것만은 해서는 안 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나님이 경고하신 것이 바로 우상숭배였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조 19명의 왕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광신적 우상숭배로 백성들을 이끌다가 나라를 망하게 했다. 우상숭배의 종류도 몹시 다양해서 광야 생활하던 시절부터 시작되었던 금송아지부터 이세벨이 도입한 아세라 목상, 앗수르와 바벨론에서 들여온 천체숭배 모압과 암몬으로부터 들여온 자식을 불태우는 인신 제사 그리고 복술과 사술 등이었다. ‘14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목을 곧게 하기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그들 조상들의 목 같이 하여 15 여호와의 율례와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들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과 경계하신 말씀을 버리고 허무한 것을 뒤따라 허망하며 또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따르지 말라 하신 사방 이방 사람을 따라 16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들을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17 또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복술과 사술을 행하고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 1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심히 노하사 그들을 그의 앞에서 제거하시니 오직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왕하17:14-18). 하나님이 절대 하지 말라고 율법으로 일찍부터 엄히 금하셨던 이 다양한 형태의 우상숭배들을 이스라엘은 왕들부터 앞장서서 장려해 왔던 것이다. 이러니 망하지 않고 어떻게 나라가 계속 유지되었겠는가? 왜 하나님은 그토록 엄하게 우상숭배를 금하셨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은 자기가 예배하는 대상을 닮게 되어 있어서, 우상을 숭배하면 그 우상이 지향하는 삶대로 죄를 함부로 짓고 살게 되기 때문이다. 예배는 한 인간의 정신적 틀이며 영혼의 방향성이다. 다양한 우상들은 돈과 섹스와 폭력을 삶의 절대적 목적으로 내세운다. 우상숭배를 하게 되면 그 사회에 황금만능주의와 음란과 폭력과 미움이 가득 차게 된다. 그 사회의 모습이 지저분하다면 그 사회의 신앙이 지저분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11. 열왕기하 17장은 북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두 번째 원인으로 하나님의 사자들을 통해 전해진 그분의 말씀을 왕들이 지속적으로 무시한 결과라고 지적한다(왕하17:13-14). 하나님은 한 번 잘못했다고 바로 멸망의 칼을 드는 무지막지한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몰라도 일단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신 이상, 부모가 자식을 징계하듯 계속해서 알아듣도록 가르쳐 주신다. 모든 왕들에게 차례로 선지자들을 보내서 때로는 부드럽게 설득도 하시고, 때로는 무섭게 야단도 치시면서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오길 원하셨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왕들의 99퍼센트가 하나님의 이 경고의 메시지들을 귓등으로 들었다. 하나님은 세상 그 누구보다 인내심이 많은 분이지만 언제까지나 참는 분은 아니시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왕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함으로써 자처한 재앙이었다.
12. 북이스라엘 멸망의 세 번째 원인은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던 데 있었다.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될 수 있었던가? 하나님께서 그 옛날 저 무서운 강대국 이집트의 전차대를 홍해 바다에서 수장시키며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안착하고 나더니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주위 나라들의 법과 시스템을 답습하기 시작했다(왕하17:7-8). 고난 중에 겸손히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이다. 다른 별다른 수가 없으니까. 그러나 모든 것이 안정되고 풍성해지고, 내게 힘이 생기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던 눈을 힐끗힐끗 옆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북이스라엘은 남유다를 압도하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졌다. 여로보암 2세 때는 국력이 절정에 다다르는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부강함 때문에 하나님을 점점 더 망각해 버렸다. 축복의 단맛에 취해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점점 잊어간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해 버린 백성들이 저지르지 못할 죄가 무엇이 있겠는가? 열왕기의 저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을 다루면서 남유다도 같은 이유로 멸망하게 됨을 지적한다(왕하17:19-20). 물론 아직 유다가 멸망하려면 136년이란 세월이 더 흘러야 하지만 열왕기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다 멸망하고 난 후인 바벨론 포로 생활 시에 기록된 책임을 감안하면 모든 사건을 다 아는 저자는 남유다가 북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을 보고도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유다도…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왕하17:19)란 표현을 이 장에 넣은 것이다. 불행히도 남유다는 하나님이 덤으로 주시는 축복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계속 타락하다가 그만 바벨론의 손에 처참히 망하고 말았다. 하나님이 아무리 좋은 기회를 주셔도 그 축복의 파도를 내가 정신 차리고 잡아타지 않으면 영영 구제받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살길이 있다면 여호와 신앙의 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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