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모음
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사도신경’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사도신경을 외워왔다. 모든 예배에서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사도신경이 어디서 유래했으며, 무엇을 위해 고백하는지 우리는 종종 잃어버리고 예배를 드린다. 최악의 경우에는 그저 주문처럼 흘려버리기도 한다. 모든 성경책 표지에 쓰여있지만, 성경에는 없는. 사람들에게 하는 ‘신앙고백’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이기도 한 사도신경은 무엇인가?
먼저 사도 신경의 ‘사도’는 12제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모든 신자를 말한다. 그리고 ‘신경(신조-Symbol)’는 사도신경을 고백함으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세상에 선언한다는 것을 말한다. Symbolum이라는 라틴어는 상징-신분증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계약을 나타내는 징표로도 쓰인다. 또한 우정이나 유대를 보이며 막대기나 판을 나눌 때도 사용하였다. 즉 사도신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기독교인의 정체성의 상징이며, 우리와 하나님의 약속의 증표이며, 교회 공동체의 믿음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사도신경의 처음은 Credo ‘내가 믿는다!’로 시작한다. 믿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나는 ufo를 믿는다./나는 내 친구를 믿는다. 전자는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께 고백하는 믿음은 아니다. 성경에 보면 귀신들이 예수님을 무서워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이때 귀신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신앙의 차원에서 믿는다는 표현은 그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넘어 그분을 의지하고 사랑하며, 따르겠다는 선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믿음은 즉 선포이다. 이것은 사람들 앞에서 나의 믿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동시에 사도신경의 끝은 ‘아멘’으로 끝난다. 이는 선포이자 동시에 기도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 나의 신앙을, 나의 믿음을 선언하는 것이 바로 사도신경을 통해 신앙 고백을 하는 행위인 것이다.
‘사도신경’의 역사
초기 교회에서는 세례 전에 세 가지 질문을 했다. “당신은 만물의 주재자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당신은 성령을 믿습니까?” 이 세 가지 질문의 근거는 마태복음 28장 19절 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이렇게 세 질문은 각각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대한 진술이다. 오늘날 우리의 사도신경도 이렇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2세기(초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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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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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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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
문답식 로마신경 |
→ |
선언식 로마신경 |
→ |
사도신경 내용 완성 |
→ |
번역 차이만 존재 |
4세기부터는 이러한 질의 응답 방식에서 고백의 진술의 형태가 되었고, 8세기에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10세기에 공인되었으며, 오늘날 약간의 번역 차이가 존재하지만 개신교에서 2가지 번역, 가톨릭의 번역 총 3가지 버전으로 사용된다.
마틴루터는 1535년 한 설교에서 “벌이 온갖 아름다운 꽃들에게서 꿀을 모으듯, 어린이들과 일반 신자들을 위해 성서 내용 전체를 잘 모아서 요약해 놓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칼빈은 “사도신경은 교회가 처음 시작되던 시기에 모든 사람이 동의한 공적 고백이다. 이 속에는 믿음의 전 역사가 간결하고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으며,성서의 순전한 증거로 보증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거기에 들어있지 않다.”고 말했다.
‘사도신경’의 내용
①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
1) 성부 하나님 |
②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사오니 |
2) 성자 하나님(예수님) |
③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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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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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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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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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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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성령을 믿사오며 |
3) 성령 하나님과 우리 |
⑨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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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죄를 사하여주시는 것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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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몸이 다시 사는 것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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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
사도신경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1)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특히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으로 전능, 창조, 아버지 세 가지를 언급한다.①
두 번째 부분은 2)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예수님은 누구인가?②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③, 죽음④, 부활⑤, 승천⑥, 재림⑦에 대해 고백하는 내용이다.
마지막은 3)성령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성령님⑧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며⑨, 용서⑩와 부활⑪ 그리고 영생⑫에 대한 고백으로 이루어진다.
‘사도신경’의 듣는 이와 목적
나 자신 |
하나님 |
대적자 |
교회공동체 |
나의 신앙을 점검하고 각오를 다진다 |
주님께 올리는 고백이자 기도이다 |
세상에 나의 정체성을 밝힌다. 이단을 구분한다. |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 공동체를 확인한다. |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사도신경은 기독교 교리의 정수이며, 우리의 믿음을 확실하게 하며, 2천년 동안 신앙공동체를 묶어주었다. 사람들의 모든 말과 글이 듣는이에 따라 다른 목적을 갖듯이 사도신경은 듣는 이에 따라 크게 4가지 목적을 갖는다.
사도신경은 먼저 나 자신에게 하는 선언이다. 기독교의 교리를 요약하여,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확인하고 점검하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하나님께 올리는 우리의 기도이다. 우리의 고백이 내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우리의 믿음을 선서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과 대적자에게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세상에 나의 정체성을 선언하여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는 것을 공표하는 일이며, 우리의 대적자에게 우리의 믿음은 어떤 시련에서도 꺽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기독교인(교단과 상관없이)교리와 해석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을 확증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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