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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18일 수요성서연구<성군 요시야의 종교개혁>
2021-08-18 12:10:53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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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왕이 보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자기에게로 모으고 2 이에 왕이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왕과 함께 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성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3 왕이 단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따르기로 하니라 4 왕이 대제사장 힐기야와 모든 부제사장들과 문을 지킨 자들에게 명령하여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그릇들을 여호와의 성전에서 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사르고 그것들의 재를 벧엘로 가져가게 하고 5 옛적에 유다 왕들이 세워서 유다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 주위의 산당들에서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폐하며 또 바알과 해와 달과 별 떼와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하고 6 또 여호와의 성전에서 아세라 상을 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시내로 가져다 거기에서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 그 가루를 평민의 묘지에 뿌리고 7 또 여호와의 성전 가운데 남창의 집을 헐었으니 그 곳은 여인이 아세라를 위하여 휘장을 짜는 처소였더라 8 또 유다 각 성읍에서 모든 제사장을 불러오고 또 제사장이 분향하던 산당을 게바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더럽게 하고 또 성문의 산당들을 헐어 버렸으니 이 산당들은 그 성읍의 지도자 여호수아의 대문 어귀 곧 성문 왼쪽에 있었더라 9 산당들의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제단에 올라가지 못하고 다만 그의 형제 중에서 무교병을 먹을 뿐이었더라 10 왕이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의 도벳을 더럽게 하여 어떤 사람도 몰록에게 드리기 위하여 자기의 자녀를 불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11 또 유다 여러 왕이 태양을 위하여 드린 말들을 제하여 버렸으니 이 말들은 여호와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곳의 근처 내시 나단멜렉의 집 곁에 있던 것이며 또 태양 수레를 불사르고 12 유다 여러 왕이 아하스의 다락 지붕에 세운 제단들과 므낫세가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세운 제단들을 왕이 다 헐고 거기서 빻아내려서 그것들의 가루를 기드론 시내에 쏟아 버리고 13 또 예루살렘 앞 멸망의 산 오른쪽에 세운 산당들을 왕이 더럽게 하였으니 이는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시돈 사람의 가증한 아스다롯과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가증한 밀곰을 위하여 세웠던 것이며 14 왕이 또 석상들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들을 찍고 사람의 해골로 그 곳에 채웠더라 15 또한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제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 16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무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무덤에서 해골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그 제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17 요시야가 이르되 내게 보이는 저것은 무슨 비석이냐 하니 성읍 사람들이 그에게 말하되 왕께서 벧엘의 제단에 대하여 행하신 이 일을 전하러 유다에서 왔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니이다 하니라 18 이르되 그대로 두고 그의 뼈를 옮기지 말라 하매 무리가 그의 뼈와 사마리아에서 온 선지자의 뼈는 그대로 두었더라 19 전에 이스라엘 여러 왕이 사마리아 각 성읍에 지어서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산당을 요시야가 다 제거하되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대로 행하고 20 또 거기 있는 산당의 제사장들을 다 제단 위에서 죽이고 사람의 해골을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21 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22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23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24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26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2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28 요시야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9 요시야 당시에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맞서 나갔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났을 때에 죽인지라 30 신복들이 그의 시체를 병거에 싣고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의 무덤에 장사하니 백성들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았더라

 

2. 재위 8년째 되던 해에 이렇게 확실한 자기 신앙을 갖게 된 요시야는 재위 12년 째 되던 해부터 나라 전체에서 우상을 몰아내는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왕은 유다와 예루살렘 전역에 산재한 우상들을 모조리 제거하라는 명을 내리는데, 이 작업은 참으로 광범위하고 철저했다. 먼저 요시야는 해와 달과 열두 궁성과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했다’(왕하23:5). 여기서 열두 궁성(the constellations)이란 12개의 별자리를 말한다. 이것은 앗수르와 바벨론에서 수입된 것으로 별자리의 변화를 통해 점을 치는 천체 숭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천체 숭배는 중동 지방과 서구 유럽에 오랜 세월 전해 내려왔고 오늘날 미국과 같은 기독교 국가에서도 호로스코프’(horoscope)라는 이름으로 널리 퍼져 있다. 하늘의 별들을 보고 개인과 나라의 운명을 점치는 이런 행위들은 당시 많은 제국의 왕실에서 습관적으로 행해져 오던 일인데 요시야는 이것을 확실히 유다 왕실에서 없애 버린 것이다. 또한 우상숭배 장소에서 행해지던 음란 행위를 단호히 몰아냈다. 성경에 나오는 미동(美童)의 집’(왕하23:7)이란 남자 창기들의 거처란 뜻이다. 아세라 우상을 섬기던 남창들의 거주지였는데 이런 것이 버젓이 여호와의 전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니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이 얼마나 타락해 있었는지 알 만하다.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결코 근절되지 않고 있는 남녀 매춘 행위가 그때에는 아예 종교의 이름으로 국가의 공식적인 지원 하에 성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시야의 과감한 결단이 아니었으면 결코 사라지지 못했을 것이다. 요시야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 도벳도 깨끗이 청소했다(왕하23:10). 이곳은 우상 신에게 자녀들을 제물로 불에 태워 바치는 끔찍한 일이 자행 되던 곳이었다. 모압과 암몬 땅에서 수입된 우상 제사 방법 중 가장 잔혹한 이 일을 하나님의 땅인 이스라엘과 유다 영토 내에서 계속해 왔던 것인데 이것을 요시야가 확실히 중단시켜 버렸다. 요시야는 유다의 선대왕들이 태양을 위하여 드린 말들’(왕하23:11)도 제거했다. 당시 태양신을 섬기는 자들은 태양신이 매일 수레를 몰고 우주를 내왕하는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태양신을 위해 말을 불에 태워 제사했다고 한다. 이것을 위해 왕명으로 제사용 말들을 전국에서 차출해와 수용해 두던 마구간을 요시야가 과감히 없애 버린 것이다. 요시야의 철저한 개혁의 칼은 멸망산’(The Hill of Corruption)으로도 향했다(왕하23:13). 멸망산이라는 이름은 영적으로 부패하고 패망한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곳은 솔로몬이 자신의 처첩인 이방 여인들을 위해 수많은 산당을 지어 준 예루살렘 동편 감람산의 남쪽 봉우리를 가리킨다. 요시야는 수백 년이 넘도록 우상 신당들이 가득했던 이곳을 깨끗이 정리해 버린 것이다. 계속해서 요시야는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단’(왕하23:15)까지 헐어 버렸다. ‘벧엘과 함께 북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우상숭배가 성행하던 곳이었다. 이로써 당시 요시야는 앗수르 치하에 있던 북이스라엘 영토까지 개혁과 정화 작업을 확장시켰음을 알 수 있다. 요시야의 우상 파괴 명령이 얼마나 철저했던지 유다 전역에서 거둬들인 우상들을 가루로 만들어서 우상숭배자들의 무덤에 뿌려 아주 흔적까지 없애 버렸다. 우상숭배를 했던 제사장들의 시신까지 찾아내어 단 위에서 불살라 버릴 정도였다. 보는 백성들이 모골이 송연할 정도의 비장한 개혁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대대적인 우상 진멸 타파 프로젝트가 유다의 최남단인 시므온 지역에서부터 북이스라엘의 최북단 지역인 납달리까지 골고루 행해졌다. 요시야가 이렇게 지독하게 우상들의 흔적까지도 말살하는 명령을 내린 것은 아마도 이때껏 선왕들의 지속적인 개혁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가 근절되지 않은 것을 보고 이 정도 극단적인 조치가 아니면 안 되겠다고 판단해서였던 것 같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위하지 말라!

 

3. 열왕기 기록을 보면 요시야가 재위 18년 곧 그의 나이 26세 되던 해에 성전 수리 도중 율법책을 발견하고 그것을 읽다가 크게 회심하여 비로소 그때부터 대대적 종교개혁을 단행한 것처럼 나온다. 그러나 요시야는 재위 12년에 이미 전국의 우상들을 태워서 가루로 만드는 종교개혁을 실시하기 시작했음을 역대기가 확인해 주고 있다. 재위 18년에 율법책을 성전 수리 도중 발견함으로써 이미 시작된 종교개혁에 확실한 동기부여를 받고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이었다. 우상들을 파괴하고 방치되었던 하나님의 전을 수리하는 종교개혁이 이미 상당히 진행되고 있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성전 수리를 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할 수 있었겠는가? 이미 상당 기간 동안의 종교개혁으로 은혜 받을 준비가 된 마음들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갑자가 발견한 율법책을 읽고 그 내용에 그토록 크게 찔림을 받고 변화될 수 있었겠는가? 요시야 종교개혁의 본격화는 재위 18년이었다 해도 그 개혁의 시작은 그보다 6년 전인 재위 12년에 이미 불붙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재위 8년에 확실한 자기 신앙을 갖게 된 요시야가 왜 4년이나 지난 재위 12년이 되어서야 이런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실천에 옮기에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원래 리더들은 한번 확신이 서면 실행하는 속도가 대단히 빠른 법인데 말이다. 학자들은 이것이 당시의 복잡한 국제 정세와 연관이 있다고 본다. 선왕인 히스기야와 므낫세, 아몬의 통치 기간 내내 유다를 압박했던 강대국 앗수르는 요시야 재위 12년까지 계속해서 유다에 악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앗수르가 칼날이 시퍼렇게 유다를 감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앗수르에서 들여온 우상들을 함부로 제거해 버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앗수르의 신들을 파괴하는 일은 곧 앗수르에 대한 반역으로 해석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무리 요시야가 강렬한 종교개혁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 해도 현실적으로 그것을 바로 실천하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하지만 요시야 재위 12년째 되던 B.C. 628년 당시 앗수르는 주변 속국들의 반란과 엘람인들의 침공으로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거기다가 신흥 강대국 바벨론과 메데 제국의 세력이 하루가 다르게 커지면서 이미 쇠락하고 있는 앗수르를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이로써 유다에 대한 앗수르의 내정간섭이 사라지게 되었고 요시야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대적인 종교개혁 운동을 과감하게 밀어 붙일 수 있었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결심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하나님의 사람 중심으로 돌아가는 회오리 바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요시야 재위 18년에 6년이라는 기간에 걸친 끈질긴 종교개혁으로 요시야는 나라 안의 우상들을 거의 깨끗이 청소해 버렸다. 그리고 숨 돌릴 틈도 없이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는 일에 돌입했다. 거룩의 전반부는 죄를 끊어 내는 것이지만 거룩의 후반부는 내 속에 하나님으로 채우는 일이다. 그러나 성전을 수리하는 데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다. 하지만 계속된 앗수르의 침공으로 국고는 불행히도 바닥이 나 있었다. 할 수 없이 요시야는 과거에 요아스가 그랬듯이 백성들로부터 성전 복구 헌금을 거두었다. 왕의 창고에 돈이 바닥났는데 국민들의 살림이야 오직 궁핍했을까? 그러나 하나님의 전을 복구하겠다는 열심 하나로 다들 없는 가운데서도 필사적으로 헌금했다. 정말 눈물의 한 푼 두 푼이 모아져서 하나님의 전을 복구하게 되었다. 성전수리는 하나님 중심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다. 온 마음 한 마음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 같은 기적이 나타났다. 온 마음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헌신과 열심히 있었다. 신앙의 원리는 전심의 원리이다.

 

4. 그렇게 모은 헌금으로 성전수리를 행했다. 그런데 성전 수리 과정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대제사장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한 것이다. 발견자가 대제사장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율법책은 십중팔구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 안에 있었을 것이다. 사실 율법책은 규정에 따라 성전의 언약궤 옆에 비치되어 있어야 했다(31:26). 그런데 그 책이 세월이 지나면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라져서 제사장들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되고 말았다. 아마도 이것은 므낫세와 아몬의 극심한 배교 행위로 이러다가는 그 악한 왕들이 율법책도 파괴해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누군가가 숨긴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율법책을 숨긴 것은 적어도 30년 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숨길 장소를 물색하다가 대제사장 외에는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지성소가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든 왕과 백성들을 하나님의 길로 바르게 인도하는 절대 기준이 되는 율법책이 먼지가 쌓인 채로 이렇게 오랜 세월 실종되었다는 사실은 유다의 영적 암흑기가 얼마나 비참했는가를 보여 준다. 어쨌든 율법책을 발견한 대제사장 힐기야는 그것을 서기관 사반에게 주어 요시야 왕에게 전달하게 했다. 서기관 사반은 그것을 요시야 왕 앞으로 가지고 가서 낭랑한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사반이 정확히 율법책의 어떤 부분을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학자들은 뒤의 문맥으로 보아 신명기 28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신명기 28장은 약속의 땅에 들어간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주어지는 축복과 저주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다 왕국이 겪고 있는 국가적 고난의 원인이 이미 근 1,000년 전에 정확히 예언되었다는 사실은 요시야 왕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왕은 그 자리에서 자기 옷을 찢었다. 이스라엘의 관습에 따르면 자기 옷을 찢거나 재를 뒤집어쓰는 것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극한 슬픔과 회개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요시야는 유다의 선왕들과 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나 있었는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우리 열조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쏟으신 진노가 크도다’(대하34:21). 요시야는 비로소 자신의 조국 유다가 왜 이런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정확한 원인 분석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를 제대로 해석하게 해준다. 인생을 제대로 이해하게 해 준다. 하나님 말씀 없이 인생을 보고 역사를 보면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보면 그림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요시야 왕은 즉시로 사람들을 여선지자 훌다에게 보내어 더 자세한 하나님의 뜻을 물어 보게 했다. 한번 하나님의 거룩을 체험하면 더욱 깊은 거룩을 갈망하게 되어 있는 법이다. 그리고 은혜 받은 사람들은 이제 구체적으로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구하는 것이다. 은혜 받은 것만으론 부족하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내 삶의 현장에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며 기도해야 한다. 훌다에 대해선 자세한 설명이 없지만 학자들은 그녀가 예루살렘 출신의 상당히 영향력 있는 여선지자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훌다는 요시야 왕의 사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두 가지로 전해 주었다. 첫째는 요시야 왕이 들은 말씀대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진 유다왕국은 하나님의 진노에 따라 멸망할 것이라는 끔찍한 내용이었다. 이미 심판은 결정이 난 상태라는 것이다. 둘째로는 심판은 결정 나 있지만 우상을 몰아내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한 요시야만은 이 엄청난 국가적 재앙에서 제외되는 은총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훌다의 입을 통해 확인된 하나님의 뜻은 요시야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 알게 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전혀 듣고 싶지 않은 힘든 내용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요시야는 자기 맘에 들든 안 들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깊은 영성이 있었다. 아마 하나님도 그렇게 판단하셨기에 요시야에게 이 계시를 정확히 주셨을 것이다. 진실을 감당할 만한 그릇이었기에 하나님이 진실을 알려 주신 것이 아니었을까?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삼는 것 이것이 종교개혁의 원리이다.

 

5. 요시야는 훌다의 예언을 듣는 즉시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장로들을 소집했다. 이것은 사실상 백성들 전부를 모으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요시야는 하나님이 자기 개인만 가지고 있으라고 이 메시지를 주신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즉각적으로 온 백성과 함께 이 메시지를 나누길 원했다. 공동체를 아는 지도자는 그런 것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하나님의 뜻을 솔직하게 백성들과 나누고 함께 떨쳐 일어나 나라의 미래를 만들어 가야 한다. 요시야는 모여든 백성들에게 직접 자신이 읽은 율법책의 말씀을 읽어 주었다. 백성들이 직접 듣고 스스로 죄를 깨달아 회개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과연 백성들은 이 말씀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요시야는 때를 놓치지 않고 앞장서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따르기로 서약하자고 백성들을 이끌었다(왕하23:3). 요시야와 온 백성들은 그 자리에서 서약하고 그 증거로 아직 남아 있는 우상의 잔재들을 나라 곳곳에서 제거하는 일에 헌신했다. 그리고 요시야가 살아 있는 동안 유다 국민들은 그렇게 거룩한 백성으로 살았다. 한 명의 거룩한 지도자를 통해 나라가 완전히 바뀌고 한 시대가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이다. 요시야는 나라의 멸망에 대한 하나님의 무거운 말씀을 들었지만 손 놓고 절망하고만 있지 않았다. 자기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억지로 바꾸어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민족이 충분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만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회개했다. 그러나 요시야는 적어도 자기 대에서만이라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노력으로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게 하고 싶었다. 요시야의 이런 점이 실로 존경스럽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미 하나님이 멸망시키라고 작정한 나라야. 내가 뭘 해도 헛수고일 텐데 뭐하며 체념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요시야는 그래도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절망 중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최대한 소망의 불을 켜 백성을 성결한 백성으로 만들려고 힘쓴 것이다. 우리는 부정적인 상황만 보고 체념해 버려서는 안 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거룩한 몸부림을 쳐야 한다.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은 몸부림치는 당신의 백성을 통해 위대한 일을 행하실 것이다. 믿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눈에 띠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을 초점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인 교회를 볼 수 있어야 한다.

 

6.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 성군 요시야였지만 그 최후는 너무나 서글펐다. 애굽 군대와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만 것이다. 요시야가 애굽 군대의 손에 최후를 맞이한 곳은 므깃도였다. 므깃도는 갈멜 산 남쪽에 있던 성읍으로, 가사 다메섹 해안 평지와 에스드렐론 평원을 연결하는 국제대로상에 있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훗날 유명한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말하기를 세계를 정복하려는 자는 반드시 이 므깃도를 먼저 장악해야 한다고 할 정도였다. 이곳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인식한 솔로몬 왕이 요새로 만들었지만 얄궂게도 이곳은 아하시야에 이어 요시야가 이스라엘 왕이 두 명이나 전사하는 운명적 장소가 되고 말았다. 요한계시록에는 인류 최후의 운명이 결정되는 아마겟돈 전쟁이 벌어질 곳이 바로 이 므깃도라고 예언하고 있다(16:14-16). 하지만 사실 요시야는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이렇게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않아도 되었다. 애굽 군대는 처음부터 유대 군대와 싸우거나 요시야를 죽일 의도가 없었다. 요시야의 죽음을 불러온 애굽 군대와의 충돌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소용돌이치던 국제 정세를 좀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때까지 이스라엘을 그토록 괴롭혔던 초강대국 앗수르는 국력이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져 신흥 강대국 바벨론에게 수도 니느웨까지 함락 당해 멸망 직전에 있었다. 그러자 근동의 남방 강대국 애굽은 거침없이 세력을 확장해 가는 바벨론을 견제하기 위해 앗수르와 손을 잡았다. 당시 수도 니느웨를 잃은 뒤 유프라테스 강 지역의 관문인 갈그미스 성을 중심으로 밀려나서 다시 세력을 모으고 있던 앗수르는 거세게 몰아쳐 오는 바벨론의 파상공세에 밀려 엄청난 곤경에 처해 있었다. 자력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바벨론을 함께 견제할 앗수르가 이대로 망할 경우 애굽은 혼자의 힘으로 저 무서운 바벨론을 상대해야 하는 끔찍한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7. ‘적의 적은 친구라고 했다. 애굽은 자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앗수르를 어떻게든 살려야 했다. 그래서 애굽 왕 바로느고가 직접 구원군을 이끌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앗수르를 원조하기 위해 나선 이 애굽의 대군은 북쪽 갈그미스 성으로 가장 빨리 이동할 수 있는 루트인 팔레스타인을 거쳐 행군하게 되었다. 하지만 유다 왕 요시야는 애굽과 입장이 달랐다. 몇 대에 걸쳐 이스라엘과 유다를 짓밟은 앗수르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쳤던 것이다. 이제 바벨론의 손에 앗수르가 멸망 당한다면 기뻐 춤출 판인데 애굽이 왕까지 직접 나서서 앗수르를 구원하는 군대를 움직인다니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요시야 또한 자신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앗수르를 구원하러 가는 애굽 군대의 앞길을 막아선 것이다. 한시가 급했던 애굽 왕 바로느고의 입장에서는 너무 화가 나는 일이었다. 사자를 보내어 요시야를 설득하려 했으나 통하지 않자 할 수 없이 유다군과 일전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바벨론을 정벌하기 위해 칼을 갈아 온 애굽의 정예 대군과 부딪친 요시야군은 분전했으나 결국 처참히 패하고 말았다. 요시야는 선한 왕이었지만 다윗 같은 경험 많은 장군이 아니었던 것이다. 난전 중에 요시야 왕 자신도 화살을 맞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것은 정말 필요한 전쟁이 아니었다. 요시야 왕이 조금만 신중했더라면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고 피할 수 있는 죽음이었다. 그것은 애굽 왕이 요시야에게 보낸 메시지에서도 알 수 있다. ‘내가 오늘날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로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를 명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대하35:21). 애굽 왕이 있지도 않은 사실을 함부로 지어내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 대국 중 하나였던 애굽이 굳이 작은 유다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유다의 하나님 이름을 빌 정도로 비굴할 필요는 없었다. 강대국 특유의 오만한 어투로 죽고 싶지 않거든 비켜라고 하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굽은 진심으로 유다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설득하는 어조로 메시지를 보냈다. 애굽 왕 바로느고는 진실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았음이 분명했다. 가끔씩 하나님은 그분을 모르는 이방의 왕들에게도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시는 수가 있다. 옛날 요셉이 섬겼던 애굽 왕 바로에게도 꿈을 통하여 장차 애굽에 닥쳐올 경제적 풍요와 환난을 알려 주신 적이 있듯이 말이다. 이번에 애굽 왕 바로느고에게도 그런 방법으로 계시가 주어졌을 것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애굽 왕) 느고의 말’(대하35:22)이라고 확인해 주고 있다. 바로느고가 요시야에게 보낸 메시지는 틀림없는 하나님의 계시였던 것이다. 그러나 요시야는 그 말을 듣지 않고 무모한 전쟁으로 자신과 부하들의 죽음을 자초했다.

 

8. 하나님을 항상 순종하고 따르는 요시야였지만 이때만은 앗수르와 애굽에 대한 인간적인 적개심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개인적인 격한 감정에 너무 사로잡히면 요시야 같은 하나님의 사람도 그분의 음성을 무시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내 자아가 너무 시퍼렇게 살아 날뛰면 하나님의 음성을 덮어버리고 갈 수 있다. 그리고 지극히 인간적인 결단과 행동으로 재앙을 자초할 수 있다. 결국 요시야는 하나님의 뜻과 인간적인 생각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슬픈 최후를 맞고 만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데 대한 대가를 목숨으로 치른 셈이었다. 그러나 요시야의 죽음을 너무 비극이라고만 해석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일찍이 여선지자 훌다를 통해 요시야에게 주었던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다.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대하34:28). 왕에게 진짜 고통은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국가의 멸망이요 망한 나라의 백성들이 겪는 환난을 목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생 나라를 거룩한 리더십으로 잘 다스리다가 전쟁터에서 깨끗이 전사한 그의 최후는 그래도 요시야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이제 그의 죽음 이후 그 아들들이 다스리는 유다 왕국은 종내에는 처참하게 외국 군대에게 유린당하고 마침내는 멸망하고 만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성군 요시야의 죽음을 슬퍼하는 백성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서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니라’(22:10). 실제로 아버지와는 전혀 닮지 않은 요시야의 아들들 대에 가서 유다 왕조는 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것이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 흐름이다. 거룩한 결심을 품는 리더 요시야왕은 한 번 하나님의 거룩을 체험한 후에 더욱 깊은 거룩 더욱 깊은 영성을 갈망하였다. 하나님은 진실을 감당할 만한 그릇에게 진실을 알려 주신다. 한명의 거룩한 지도자를 통해 나라가 완전히 바뀌고 한 시대가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 감정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사람도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무시함으로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래도 요시야의 신앙개혁 종교개혁 영성개혁은 커다란 영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 온다. 우상철폐 성전수리 말씀흥왕 백성 공동체 이 같은 것을 요시야로 하여금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로 달려가게 하시고, 우리를 맞아 주신 주님의 은혜를 다시 기억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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