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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증언자 : 이선균    증언일자 : 20.05.24  
조회 : 83  
  본문말씀 : 창32:21-31,롬1:14-17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이 시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가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부활절기의 마지막 주일이며 감리교회 창시자인 존 웨슬리 회심 282 기념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을 만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8세기의 영국은 혼돈과 광기의 시대였습니다. 아니 유럽 전체가 그랬습니다. 왕정이 붕괴되고 시민의 정부가 들어서는 과도기였습니다. 영국 전체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총체적인 위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복음의 깃발을 높이 들고 나온 사람이 존 웨슬리였습니다. 단지 신실한 목사였을 뿐, 자기가 무슨 영국을 살리겠다고 나선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결과는 영국을 살린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를 두고 영국의 수상이었던 로이드 조오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앵글로 색슨족이 낳은 최대의 지도자이다. 그의 신앙운동은 종교 개혁 이상의 영향을 끼쳤다. 존 웨슬리는 전 인류사회에 새로운 정신의 생명을 던져주었다고 했습니다. 회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경험입니다. 이 회심의 이야기를 오늘 본문 말씀이 전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회심에는 얍복강의 경험이 있습니다.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야곱발꿈치를 잡다’ ‘속이다’(아키브)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그러나 뒤편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그렇게 보면 야곱은 하나님이여 뒤에서 그를 지키소서라는 뜻이 됩니다. 이름은 발꿈치를 잡는 야곱에서 하나님과 함께 겨루는 이스라엘이 되는 과정에 얍복강의 홀로 남았더니의 경험이 있었습니다. 20년 만에 고향을 향해 돌아오고 있는 야곱이 얍복강가에 다다랐습니다. 얍복 강은 갈릴리 바다와 남쪽 사해 염해를 이어온 요단강 그 중간쯤에서 동쪽으로 뻗어 있는 작은 지류를 의미했습니다. 우기에만 물이 흐르고 평소에는 메말라 있는 간헐천이었습니다. 그런 천을 보통 와디라고 부릅니다. 오늘날에는 푸른 강을 뜻하는 와디 제르카(Wady Zerka)라고 부릅니다. 얍복강 이름은 비어있다’(바카크)는 말에서 또는 싸우다’, ‘씨름하다’(야바크)는 말에서 강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이 강은 하란과 브엘세바를 연결하는 길목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얍복강에 이르자 형 에서가 군사 400과 함께 야곱을 죽이려고 온다는 정보에 접하자 야곱은 절대 절명의 위기 앞에 놓였습니다. 여기서 야곱은 즉시 뇌물작전을 세웠습니다. 예물공세로 형의 마음을 돌려보려는 전략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견딜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으로 마음이 심히 고통스러웠습니다. 뒤로 돌아갈 수도 앞으로 나갈 수도 없는 자리, 절망과 죽음의 자리가 얍복강이었습니다.  

얍복 강가는 야곱의 한계상황이었습니다. 성경은 '홀로 남았더니"(32:24)로 표현하는 그 순간, 그 순간만은 소유로도 다른 아무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야곱이 만난 최대의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실은 이 순간을 신학은 '종말론적 순간'이라 합니다. 야곱은 종말론적 순간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야곱은 그의 전 존재를 걸고 하나님과 씨름합니다.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과 돌보심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참한 지점에서 하나님과 벌이는 씨름이었습니다. 자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얍복 강이 있습니다.   

1738년 미국 조지아 선교에서 실패하고 영국으로 돌아온 존 웨슬리는 그의 회심의 기사는 후대의 감리교인들에게 하나의 본보기를 제시해 주었고 그의 회심 기념일은 감리교인들이 창립자의 삶과 행적을 기억하는 교회력의 중요한 행사가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의 회심의 배경에는 여러 많은 요소들이 있지만 특히 귀향 후 가졌던 실패감과 피터 뵐러(Peter Böhler)와의 만남이 영향을 주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얍복 강의 야곱의 경험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웨슬리가 영국 딜에 상륙한 후 런던에서 그의 회심이 있기까지 4개월 동안 그의 마음은 확신과 의심 사이를, 그리고 하나님의 현존하심에 대한 느낌과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은 느낌 사이를 오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힘든 시간 동안 그는 신학적 회의와 실패 그리고 이 시점까지 그를 끈질기게 따라다녔던 죽음의 공포와 씨름했습니다. 하지만 강한 의무감이 아직 그를 사로잡고 있었기에 그는 이 비판적인 자기 평가 기간 동안에도 설교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조지아에 대한 관심이 너무도 컸기에 웨슬리는 많은 설교 요청을 받았지만 곧 교회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212일 그는 홀본의 성 안드레 교회에서 고린도전서 13장의 다음 구절을 주제로 설교를 했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여도 ……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런 유익이 없느니라.” 예배를 마치고 그는 더 이상 그 교회에서 설교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같은 일은 반복되었습니다. 그가 설교하는 성경의 본문들은 대개 누가복음 9:23처럼 희생과 자기부정에 관계되어 있는 급진적인 소재로, 청중들을 불쾌하게 만들었기에 많은 교회들이 그의 설교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510일에서 13일까지 웨슬리는 또다시 우울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는 슬펐고 매우 답답했다. 독서를 할 수도 없었고 명상이나 노래, 그리고 기도를 비롯한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었다.”고 썼습니다. 하지만 뵐러가 미국으로 떠나는 배 안에서 써 보낸 58일자 편지는 웨슬리를 기쁘게 했습니다. 그 편지에서 뵐러는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불신앙의 죄를 주의하십시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아직 그것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바로 오늘 그것을 극복한다고 생각하십시오.’ 흥미로운 것은 뵐러가 불신앙을 죄로 여겼고, 웨슬리가 그 같은 해석을 수용했다 것입니다.   

동생 찰스가 먼저 회심을 했습니다. 찰스는 521일 성령강림절 주일에 영적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당시 찰스는 병에 걸려 누워 있었지만 즉시 치유되어 곧바로 내 방황하는 영혼은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라는 찬송을 지었습니다. 존 웨슬리의 우울한 나날은 그 다음 주 월요일과 화요일에도 계속되었지만, 1738524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날 아침 외출하기 전 웨슬리는 신약성경의 책장을 넘기다가 네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도다란 구절에서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날 오후 그는 성 바울 대성당으로 가서, 그곳에서 루터가 좋아하는 시편의 한 구절인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를 토대로 만든 성가를 성가대가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문장과 음악의 조화는 웨슬리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날 저녁 그는 아주 마지못해올더스게이트 거리의 한 집회 모임에 참석했고, 그곳에서 회원 중 하나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들었습니다.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915분 전쯤 되어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일으키시는 변화를 설명하고 있을 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strangely warmed)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의지한다고 느꼈으며, 그가 나의 구원을 위해 죄를 없게 하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하여 주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우리는 이 회심 경험으로부터 어떤 것들을 알 수 있을까요? 자기를 향한 절망의 시간인 얍복강의 경험이 있은 후에 하나님의 주인 되심과 구원하심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이 순간을 기점으로 자기 반성적인 성향이 현저히 줄었고, 524일에 내린 닻은 이제 튼튼하게 버티어 주게 되었습니다. 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한계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구원을 얻었습니다. 173911일 일기에 연말에 있었던 패터레인 집회의 성령체험을 고백한 이후에 구원의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야외설교를 비롯하여 맹렬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는 복음으로 거대한 성령의 제국 감리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얍복강의 경험은 하나님의 복음을 만나게 했습니다. 얍복강의 한계상황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잊지 말고 기억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회심에는 하나님을 만나 환도뼈가 어긋나는 경험이 있습니다.   

24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어떤 사람’(32:24)과의 씨름은 하나님과의 씨름이었습니다. 허벅지 관절 환도뼈가 부러져 나가는데도 하나님의 축복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환도뼈의 위골은 옛사람 야곱을 깨뜨린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이고 사랑의 가시였습니다(고후12:7-12). 전 존재의 파괴를 의미합니다. 소유욕으로 오염된 전 삶, 생명체의 부서짐을 뜻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야곱은 죽고 새로운 존재, 이스라엘이 태동되고 있었습니다. 에릭 프롬의 말대로, 소유(To Have)에서 존재(To Be)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의 강가, 인간 한계 상황의 얍복강이 한순간 하나님을 대면하는 브니엘로 바뀌면서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구원은 영원한 순간이 나의 절망 같은 순간에 섬광처럼 비추는 선물 같은 것이었습니다. 회심은 빛의 경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메타노이아(metanoia) 회심입니다. 구심점을 움켜쥠의 소유로부터 하나님께로 돌린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서 하나님께로, 내가 의지하던 그 밖의 것에서 하나님께로 결정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로의 태어남, 이제 야곱에게 소유는 더 이상 삶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으로 변화된 새 존재가 된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모두 포기하는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온 축복, 새 민족으로 다시 태어나는 존재의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자아 중심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는 회심의 축복을 누리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이 회심하는 순간에 읽혀졌던 것이 로마서1장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절을 마르틴 루터가 해석한 말씀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하나님 만남과 체험은 탑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탑 속의 체험을 통해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까지는 비록 종교적인 삶을 살았지만 죄 의식과 어두움과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사로잡힌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루터가 인격적으로 생생하게 만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지금까지 루터가 관념적으로 알았던 진리와 심판의 두려운 하나님과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루터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시고 끊어짐을 당하신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은혜의 예수님이셨고 루터 대신 아들을 버리시고 끊어지게 하신 긍휼과 자비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루터가 경험한 첫 번째 종교적 체험은 15057월 무더운 여름 어느 날 슈토테른하임의 뇌성벽력 가운데 죽음의 공포로 임했습니다. ‘성 안나여, 내가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서원하였고 법학도에서 수도사로 바뀌었습니다. 루터가 경험한 두 번째 종교적 체험은 에르푸르트 수도원의 수도사가 된 후 2년 동안의 견습 수도사 생활을 한 다음 사제로서 첫 미사를 집행했을 때 소멸하는 불과 같은 또 하나의 벼락에 맞는 듯한 죽음의 공포로 임했습니다. 루터가 경험한 세 번째 종교적 체험은 비텐베르그 대학의 탑 속 서재에서 소위 탑 속의 체험이라고 불리는 복음적 체험으로 임했습니다. 시편 22편을 읽고 있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루터는 이 구절을 통해 자기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그려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 시편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글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글이었음을 생각했을 때 이해할 수 없는 놀라움에 사로잡혀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습니다. ‘어째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버림을 당해야 한다는 말인가? 나 자신이 버림을 당하는 것은 얼마든지 타당한 일이다. 나는 약하고 불순하고 불경건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약하지도 불순하지도 불경건하지도 않으신데... 어째서, 어째서?’ 다음 순간 루터는 벼락에 맞은 듯한 놀라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끊어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나, 루터 대신에 그리스도가 친히 하나님으로부터 끊어버림을 당했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가 내 대신 죄를 담당하시고 나 대신 죄가 되셨다.’ 루터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은 이제는 더 이상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 가득 찬 구주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도 전혀 새로워졌습니다. 진노와 심판의 하나님이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성취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단순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성취가 아니라 선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자신의 환도뼈가 깨지는 듯한 빛의 체험을 했던 것입니다. 이 같은 회심의 축복을 누리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회심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브니엘의 경험이 있습니다.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얍복강 씨름 사건은 야곱의 전 생애에서 하나의 전환점입니다. 야곱이 정말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은 바로 이 시점입니다. 그 이전까지 야곱은 종교를 이용하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곤란에 빠지거나 어려움이 생길 때면 항상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때까지 그는 단지 종교를 가지고 이용했을 뿐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외적인 것으로 자기에게 편리할 때나 이용하는 꽤 괜찮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얍복강 씨름 시점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이 시점부터 그는 하나님을 참으로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와 하나님을 진정으로 체험하는 회심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하나님을 만난 이후로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 그런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이 되는 복음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회심은 항상 강렬한 개인적 인격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계속 대면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단둘이 남게 되었고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그래서 회심은 항상 우리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 주는 체험입니다. 이 체험의 본질은 한 개인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을 평소에 늘 잊어버리고 살다가 자기가 필요한 순간에만 하나님께 도움과 구조를 요청하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회심 이후로는 하나님과 항상 인격적 관계 다시 말하면 친밀한 관계 속에서 신앙생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브니엘입니다. 얼굴(브니)과 하나님을 뜻하는 엘이 합해져서 브니엘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기독교는 한 인간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따금씩 우리를 축복해 주는 어떤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고 하나님은 참이시고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 말하고 들으시고 우리가 매순간 얼굴을 뵈옵는 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눌 수가 있습니다. 브니엘 체험을 하기 전에 야곱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비인격적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브니엘에서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회심이 축복인 것은 그 후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친밀한 만남이 이루어지면 그것은 평생 헤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얼굴 뵙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구원하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늘 대면하며 날마다 브니엘의 아침을 경험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찾아와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지금 살고 있는 그 인생이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셨던 네 모습에 합당한 삶이냐?’ 회심한 사람이 깨닫게 되는 것은 내 인생의 진짜 문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정열을 쏟고 있는 문제들이, 우리가 그렇게 염려하고 괴로워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실은 궁극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우리가 그토록 번민하고 괴로워하는 가운데 머리를 짜내고 계획하는 모든 것들이 실은 진짜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 시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골치 아픈 세상을 향해 복음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진짜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의 영혼이 사는 영생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자로서 하나님 중심신앙으로 하나님을 대면하며 복음을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음은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 하면 복음 안에서 친히 하나님께서 도움을 주시고 구원을 이루시는 의로 인간을 만나시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적 배경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의 의'는 냉혹한 심판자의 속성이 아니라 그의 언약의 약속의 신실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이 다스리시기를이란 이름을 '하나님과 겨룬 사람'이란 뜻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언약백성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는 철두철미 믿음에 근거하여 복음 안에 나타나 있습니다신뢰하는 자세로 하나님의 행위에 스스로를 개방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하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 편에서 취해야 할 유일한 전제입니다. 날마다 브니엘의 복음을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심은 얍복강 경험입니다. 환도뼈가 부서지는 경험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하는 브니엘의 경험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믿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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