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예배

신록의 5월 가정의 달 첫 주일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예전에는 꽃을 예배당 안에 가득 장식하고 예배를 드려서 꽃주일이라고 했습니다. 꽃 같은 어린이를 생각하며 예배드렸던 것입니다. 유아세례 받으신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어린아이들은 늘 어른에게 세 가지를 보여줍니다. 첫째는 아무런 이유 없이 즐거워하고 둘째는 무슨 일인가에 항상 바쁘고 셋째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전심전력으로 할 줄 아는 것입니다. 어린이를 생각하며 예배드리는 어린이 주일에도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네스 바네아는 성경에서 중요한 지명입니다. 출애굽한 백성이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가나안 정탐을 시행한 곳입니다. 정복 불가능성을 보고 받고 하나님을 배반한 반역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 광야 38년을 헤매게 되었던 것입니다. 광야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사건이 이곳에서 일어났습니다. 본문 24절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그의 자손이, 그의 어린이들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고 했습니다. 불신앙의 어른들은 여호수아 갈렙을 빼고 한명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가데스 바네아의 반역 사건’이라고 제목을 붙이기도 합니다.
12명의 지파 대표를 정탐꾼으로 하여 가나안 땅을 정탐했습니다. 그 땅이 어떤지 가능한지 살만한지 40일간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합니다. 12명중 10명의 부정적인 보고를 듣자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역사를 통해 영광스런 출애굽 하였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 자유인으로 살 희망찬 미래의 꿈을 일순간에 망각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의 가치를 부인하고 모세를 시해하려는 대반역이 일어납니다. 12명중 나머지 2명인 여호수아 갈렙은 목숨을 걸고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 올라가자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그 땅에 들이실 것이다’ 강변하지만 백성들은 그 두 사람조차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크게 진노하셔서 선민 지위 박탈 그리고 진멸을 결심하셨습니다. 중보자 모세가 간곡히 하나님께 이 백성을 사하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반역의 결과로 선동한 10명이 처형되고 여호수아 갈렙을 제외한 당시 20세 이상의 사람은 단 한 명도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죽게 된다는 선고가 내려집니다. 그 후 일부 백성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가나안을 정복하겠다고 나섰다가 크게 실패하고 도망치게 된 일도 있었습니다. 이 반역으로 어른은 가나안에 못 들어가고 어린이들 자녀들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누가 천국에 들어가고 천국에서 큰 사람입니까’를 묻고 있습니다. 그 대답은 ‘어린아이’라는 것입니다. 어린이 주일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첫째로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21 진실로 내가 살아 있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을 두고 맹세하노니 22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 ‘돌이켜’라는 말은 새 번역 성서에는 ‘너희가 마음을 돌이켜’로, 공동 번역 성서에는 ‘당신들의 생활태도를 바꾸어’로 번역했습니다. 원문의 뜻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강력한 행동과 결단을 요구하는 혁명적인 단어입니다. 불신앙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불신앙적 다수가 신앙적 소수를 능욕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 그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원망이 전공인 백성이었습니다. 홍해가 가로 막히자 원망했습니다. ‘11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14:11-12). 마라에서 쓴물을 만났을 때 원망했습니다.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출15:23-24). 신 광야에서 원망했습니다.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16:1-3). 르비딤에서 물없다고 원망했습니다.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출17:1-3). 시내산 아래에서는 금송아지 우상으로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출32:1-6).
하나님의 능력보다 원수의 강한 것만 보았기에 원망했습니다. 다수의 불신앙자가 소수의 의인을 억압함으로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습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믿음 없음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불순종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두려움에서 용기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의지 신앙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불신앙을 가지고서는 가나안 땅에도 천국에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죄인은 결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불굴의 신앙으로 가나안 땅을 바라본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그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다고 했습니다. 온전히(말레)는 ‘채워넣다’ ‘빈공간을 채우다’ ‘풍족하다’ ‘고갈이 해소되다’라는 뜻으로 순종의 기갈에 빠지신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림을 표현한 것입니다. 갈렙이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끝까지 신뢰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다는 것입니다. 갈렙은 그들과 마음이 달랐습니다. 영이 그들과 달랐습니다. 돌이켜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하나님을 반역케 한 영이 악령이었듯이 갈렙의 마음을 돌이키게 한 것은 성령이었습니다. 돌이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리에 섰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14장 31절에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신앙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어린 아이의 신뢰하는 신앙의 자세로 돌이켜야 합니다. 오직 믿음만이 구원의 방도이고 최후 승리의 길입니다. 어린 아이같이 돌이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천국에서 누가 크냐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높아지려는 교만을 아신 예수님은 먼저 그 길에서 돌이키길 촉구하셨습니다. ‘돌이켜’(스트라페테)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적을 다투고 자리를 다투는 제자들에게 멈추어 서서 돌이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행동의 변화를 촉구하셨습니다. 돌이켜 하나님을 의지하고 돌이켜 하나님을 믿고 돌이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에 들어가고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돌이켜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어린 아이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예수님의 두 번의 수난예고(마16:21-28,17:22-23)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세적인 권력욕과 명예욕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더 크냐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다투는 제자들에게 누가 천국에서 크냐 물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제자가 질문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질문은 아직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오직 정치적인 메시야로만 보았습니다. 분위기를 보니 예수님이 그 나라를 세울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그 나라에서의 서열을 따져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구속사역을 완성하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세와 정치권력 쟁취만을 기억하고 이렇게 질문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제자들 앞에 세우시고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 아이처럼 겸손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겸손이 중요합니다. 높이를 다투는 제자들에게 스스로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로 인정받는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높아지려는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와 같이 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하셨습니다. 천국 가는 것을 당연시하고 따놓은 것으로 여기고 이후의 지위에 대해 관심을 쏟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 자체에 의구심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돌이켜 어린아이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부르심은 누림이 아니라 섬김입니다. 그 섬김을 위해 자세를 낮추어야 합니다. 제자 상호간에 또는 성도 상호간에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를 가르치시는 내용이 마태복음 1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앞에 죄인이었으나 택함을 받고 구원을 얻은 자로서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겸손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춘다는 것 겸손하다는 것은 어린 아이에게 겸양지덕이 있어서 본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어린아이들이 사람들 앞에서 자기 공로를 내세우거나 인정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 시민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겸손해야 함을 교훈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무시당하는 존재에 불과한 어린이를 천국 시민의 표본으로 제시하셨습니다.
‘낮추다’(타페이노오)의 본래 의미는 ‘평평하게 하다’ ‘평지로 만들다’입니다(눅3:5). 이것은 울퉁불퉁한 땅을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 불쑥 솟아오른 언덕을 깎아 낮은 골짜기로 끌어내리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은유적으로 ‘비천한 상태로 떨어뜨리다’ ‘더 천한 환경으로 몰아넣다’라는 의미가 생겼습니다. ‘내리누르다’ ‘아래로 이끌다’ ‘굴욕을 주다’라는 뜻으로 결국 본 절은 천국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자에게 허락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당연히 들어갈 줄로 알았던 제자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린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나 순결함이 아니라 본질상 연약하여 혼자 힘으로는 살 수 없고 부모에게 절대 의지해야만 하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며 그분만을 의지하려는 믿음과 자신을 과대평가하거나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는 겸손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 겸손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공적에 힘입어 천국에서의 서열을 주장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겸손을 척도의 우선순위를 정하셨습니다. 천국에서는 오직 겸손만이 요구됩니다. 겸손한 자가 큰 자입니다. 티끌에 앉는 자가 하늘에 가까이 있다는 말입니다(앤드류 그레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을 낮춤으로 천국에서 높은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어린 아이를 영접함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영접’(데코마이)은 ‘환영하다’ ‘손님으로 대접하다’ ‘환대하다’ ‘인정하다’ 이런 뜻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천국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남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마음은 곧 자신을 크게 생각하는 교만함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강한 자를 약하게 하십니다. 교만한 자를 낮추십니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의 눈에는 어린아이가 천하고 보잘 것 없어보여도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를 귀히 여기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어린 아이들을 영접해야 합니다. 관심 사랑 배려를 통해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외식이나 강제성을 띠지 않고 주님을 영접하듯이 어린아이를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은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어린 아이를 영접함이 곧 예수님 자신을 영접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마음은 그만큼 낮아져 있는 마음입니다. 주님은 낮은 곳에 임하십니다. 여러분 주변에 있는 어린 아이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어린이는 천지 순수 단순 겸손합니다. 신뢰가 있습니다. 낮아진 자세 발을 씻기는 심정으로 어린이를 영접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이야말로 주님을 영접하는 핵심 과정입니다.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탁월한 삶은 자기탐닉, 자기표현, 자기숭배라는 토양에서 싹튼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내키는 대로 살고 자신만 생각하고 마음껏 자기를 내세웁니다. 거기에 대고 예수님은 자기 부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말씀은 희미해져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참으로 독특합니다. 세상 문화와는 전혀 다른 요구를 하십니다. 남들이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할 때 내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회가 이리 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 저쪽을 선택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주님의 계산법으로는 ‘가장 작은 게 가장 큰 것이다’(눅9:48) ‘꼴찌가 되는 게 곧 일등이 되는 길이다’(막9:35) ‘높은 자리가 사실은 끝자리란다’(눅14:8-9) 그리스도는 지금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말고 남들을 존경해라’ (롬12:10) ‘다른 이들을 자신보다 낫게 여겨라’(빌2:3) ‘다른 쪽 뺨을 돌려대고, 겉옷을 벗어주며, 더 먼 데까지 길이 가주거라’(마5:39-41) ‘어린 아이를 영접하라 그게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로마의 압제 밑에 있던 그 당시의 유대인들의 눈앞에는 배신과 도피, 저항이라는 세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네 번째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섬김입니다. 미워하는 이를 섬기고 상처를 입힌 이들을 용서하라는 겁니다. 높은 자리가 아니라 낮은 자리를 찾아 앉으라고 하십니다. 섬김을 받기보다 스스로 섬기라고 명령하십니다. 복수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원수를 갚지 말고 온유하게 대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리스도는 ‘십 리를 동행하는 원리’를 만드셨습니다. 당시 로마 군인은 유대인들을 징발해서 1.5km 정도까지 짐을 나르게 할 수 있는 권한을 법률로 보장받았습니다. 그저 한마디 명령이면 들일을 하던 농부든 가게를 보던 장사꾼이든 다 부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을 당하더라도 ‘요구받은 것보다 더 많이 주라’고 가르치십니다. 두 배쯤 더 주라는 뜻입니다. 1.5km 구간이 다 끝났는데도 멈추지 않고 더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쯤에서 멈출 순 없죠. 온 만큼 더 가드리죠’라는 소리에 로마 병사는 뒤로 자빠질 만큼 놀랄 겁니다. 주님은 부탁을 받은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주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마음이 그런 마음입니다.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신앙으로 주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이 만져 주실까 싶어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이분이 누구이신 줄 아시오? 바로, 만왕의 왕이시오.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선생이시란 말이오. 이렇게 높으신 분이 한낱 아이들이나 상대할 시간이 있을 것 같소? 그 정도로 하찮은 분이 아니란 말이오. 이 시끄러운 아이들을 상대할 분이 아니란 말이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이런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런 다음 아이들을 가까이 부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눅18:16-17). 예수님께 아이들은 귀찮은 존재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아이들을 성가시게 여기지 않으셨으니 우리도 그래야 마땅합니다. 사실 어린 아이들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가르쳐 주는 최고의 스승입니다. 아이들의 솔직함 부모를 의지해서 무슨 일만 생기면 부모에게 달려가는 모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관계를 그 무엇보다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모든 어린아이들이 들을 필요가 있는 일곱 가지 언어가 있습니다(7Things every child needs to hear.) ‘사랑해(I love you.)’ ‘네가 자랑스러워(I’m proud of you.)’ ‘미안해(I’m sorry.)’ ‘용서할게(I forgive you.)’ ‘들어줄게 천천히 애기해봐(I’m listening.)’ ‘이건 너의 책임이야(This is your responsibility.)’ ‘너는 할 수 있는 자질이 있어(You’v got what it takes.)’ 이렇게 말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해 자랑스러워 최고야 예수님은 우리가 어린 아이들에게 주목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낮추시기 바랍니다. 어린 아이를 주님 영접하듯 영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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