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예배

저는 지금 사진을 2장 보려고 합니다. 지금 보시는 사진은 타조입니다. 타조는 큰 새 중 하나입니다. 날개는 퇴화하여 날지 못합니다. 그러나 튼튼한 다리로 빨리 달릴 수 있는 새입니다. 그런데 이 타조는 2번째 보는 장면처럼 머리를 모래에 숨기는 습성이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사진은 ‘무섭고 두려워서 모래에 머리를 숨긴 타조’라는 이름으로 검색되는 사진입니다. 잘 보시면 지금 보시는 타조는 머리를 땅에 박고 있습니다. 머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위험이 생기고 숨을 때가 없으면 타조는 머리만 모래에 파묻는다고 합니다. 실제로 인터넷을 검색하면 타조가 정말 모래에 머리를 박고 있는 모습의 사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면서 재미있는 생각을 합니다.
그 생각은 타조증후군으로 정리되었습니다. 타조가 평지에서 맹수나 사냥꾼을 만나면 모래에 머리를 파묻는 타조의 행동을 두고 생긴 말입니다.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대응 및 해결을 하려 하지 않고 숨는 모습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더 큰 화를 입게 됩니다.
하지만, 타조가 머리를 모래 속에 처박는 이유는 더운 날씨에 체온을 조절하기 위해 수분이 있는 땅바닥에 목을 길게 내려뜨리고 쉬는 습성이 낳은 결과라고 합니다. 또한, 머리를 땅에 되면, 작은 소리도 훨씬 잘 듣게 된다고 합니다. 땅에 귀를 대고 있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조가 땅에 머리를 박고 있는 모습은 타조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행동입니다. 문제는 이 모습을 보고 인간이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타조가 맹수에 쫓기다가 땅에 머리를 박는 것은 맹수가 계속 따라오는지 어디에 맹수가 있는지를 땅의 울림을 듣고 정확히 파악하는 위한 행위로 보는 것이 타조를 관찰한 사람들의 의견입니다.
오순절 성령님의 오심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오순절 성령님의 오신 사건을 오해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들은 성령님이 오심이 불편하기도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 13절, ‘새 술에 취한 모습’이 자신들에게 나타나는 것 자체가 불편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오셨을 때 성도의 모습을 ‘새 술에 취한’ 모습으로 본 것은 성령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성도들을 일부러 낮추는 표현, 조롱 비하입니다.
교회는 오늘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절을 맞이했습니다. 성령강림절은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성령님이 오신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어떤 분들은 성령강림절을 교회의 생일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지난주까지 부활의 상징인 흰색을 사용하다가 오늘부터 붉은색을 사용합니다. 붉은색은 성령강림을 의미하는 색입니다.
오늘 저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 성령강림의 의미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첫째, 성령님 오심은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가끔 나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고민하며 살펴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십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속을 알기 어렵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알기 위해서 그 사람의 행동을 관찰합니다. 행동을 잘 보면 속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항상 닭고기를 먹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그는 오리고기보다 닭고기를 매우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상황이 바뀌면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오리고기가 닭고기보다 비싼데, 파격 세일해서 오리고기를 닭고기보다 매우 싼값에 구매할 수 있는 기회가 생깁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이 비싼 닭을 구매해서 먹으면 그 사람은 원래 닭을 좋아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가격 때문에 닭을 좋아했다고 생각한 사람은 그 사람은 여러 이유를 대겠지만 오리를 사 먹게 됩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스라엘에 왔을 때의 일입니다. 어떤 유대인이 대왕에게 물었습니다. “대왕께서는 우리가 가진 금과 은을 갖고 싶지 않으신지요?” 그러자 알렉산더 대왕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금과 같은 보화를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그런 건 조금도 탐나지 않소. 다만 당신들 유대인들의 전통과 정의는 어떤 것인지 알고 싶을 뿐이요.”라고 말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스라엘에 머무는 동안에 두 명의 남자가 어떤 일을 상담하기 위하여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내용인즉슨 한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넝마 더미를 샀는데, 그 넝마 속에서 많은 금화가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넝마를 판 사람에게 “나는 넝마를 산 것이지 금화까지 산 것은 아니오. 그러니 이 금화는 마땅히 당신 것이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넝마를 판 사람은 그것을 산 사람에게 “나는 당신에게 넝마 더미 전부를 판 것이니, 그 속에 들어 있는 것도 모두 당신 것이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랍비는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 판정을 내립니다.
“당신들에게는 각기 딸과 아들이 있으니, 그 두 사람을 서로 결혼시킨 뒤, 그 금화를 그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옳은 사리일 것이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대왕님, 당신의 나라에서는 이런 경우 어떤 판결을 내리십니까?” 그러자 알렉산더 대왕은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두 사람을 함께 죽이고 금화는 내가 갖소.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정의’요.”
이 이야기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겠지만, 알렉산더 대왕이 처음 대화에서 유대인들의 금과 같은 보화를 조금도 탐나지 않는다고 자신의 마음을 말했지만,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의 나라에서의 판결을 설명하면서 자신이 유대에 온 것은 금과 같은 보화를 빼앗기 위해 왔다는 속마음이 들키게 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하나님이 판단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믿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정말로 믿었겠습니까? 이것은 그들의 행동을 보면 어느 정도 유추가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에는 부활을 믿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살아 있는 모습으로 보이시고 그들에게 부활을 진짜 믿게 하였습니다. 그 믿음의 연장선에서 성령님의 오심을 믿음으로 기다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오심은 그 믿음이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신약 본문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복음과 같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복음을 전편으로, 사도행전을 후편으로 써서 데오빌로라는 당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보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전반부는 누가복음 후반부와 연결됩니다. 이 부분을 꼼꼼히 읽어 보면 성경은 여자들 포함 제자들 누구도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고 표현합니다.
누가복음 마지막 24장 앞부분 여자들이 무덤을 찾았던 것은 당시 장례예식을 알고 있다면 그들은 마지막 장례 예식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장례예식은 안식일이 다 되어 시작된 장례라 죽은 예수님의 몸에 세마포만 입히고 죽은 자에게 바르는 향품을 못 바르고 끝이 났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안식일 후 첫날 새벽 죽은 자에게 향품을 바름으로 장례예식을 마감하려고 합니다.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열한 사도와 모든 이들에게 알렸을 때, 열한 사도와 모든 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부활을 믿지 않았음을 증거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듣고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듣고 반응한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무덤에 달려가 구부려 안을 들여다본 것이 다였습니다. 베드로도 거기까지였습니다.
안식일 후 첫날 제자 중 두 명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표정은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고 기록됩니다.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길에서 만났지만,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인식에는 예수님은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월절 이후 1주간의 무교절, 이후 초실절, 첫 추수에 대한 감사 제사, 그리고 40여 일이 지난 오순절이 되는 추수에 대한 감사 절기, 농사 절기로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거주하여 성령님을 기다린 주간은 농사 주간 중 아주 바쁜 시간입니다. 추수 기간은 농사 일 중에서 가장 바쁜 시기 중 하나입니다. 이 바쁜 기간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행전 1장 4절, 5절에 증언합니다.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보고 체험한 제자들에게 주어진 임무였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 기다림은 결코 공수표가 아닌 확증적인 믿음이 되게 하셨습니다. 성령님 오심은 바로 이렇게 믿음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둘째, 성령님 오심은 소망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약속을 기독교에서는 ‘언약’이라는 표현합니다. 보통 약속은 서로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약속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이 표현은 대부분의 경우 힘을 많이 가진 쪽이 더 큰 이익을 생기도록 약속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근대 국제법의 토대 위에 맺어진 일명 강화도조약은 불평등 조약입니다. 당시 일본은 하고 싶은 대로 조약을 확정합니다. 예전에는 ‘빵셔틀’이라는 용어가 있었습니다. 힘센 아이들이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고 빵 심부름을 시키는 용어입니다.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 사이에는 상당히 큰 불평등 구조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의 약속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약속은 분명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약속이기에 불평등하지만, 이익 측면에서 보면 피조물인 인간에 더 이익을 보게 설계됩니다.
죄악의 결과로 나라가 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기에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에스겔 36장은 유다 백성의 포로 귀환에 대한 희망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에스겔 37장에서 에스겔은 마른 뼈 환상을 봅니다.
에스겔 37장 1절 – 2절
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에스겔은 하나님의 권능과 그의 영에 이끌려 어느 골짜기 가운데 서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의 큰 환상을 봅니다.
이것은 에스겔 자기 나라 유다의 현실입니다.
마른 뼈 환상입니다.
망한 나라의 회복 약속을 들었기에 이젠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할 텐데 현실은 마른 뼈입니다.
이것은 그때만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2000년 당시 불의와 억압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기대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바라본 제자들의 심정일 수 있습니다.
1738년 하나님의 방법대로 당시 선교지에 복음을 증거하러 갔다가 밤에 도망치듯 영국으로 돌아온 웨슬리 목사님도 마른 뼈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2년째 계속 되고 있는 세계적 유행병 코로나의 상황이 녹녹하지 않습니다.
저는 최근에 마음이 아프신 분들을 대상으로 전화상담 봉사를 일주일에 2~3회 합니다. 우울증으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있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남들에게 심지어 부모님께도 말을 못 하고 젊은이들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원인을 찾아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냥 힘이 없고, 움직이지 못하겠고,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본인의 이야기를 하면 처음에는 들어주지만, 그냥 힘내라고만 말하니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다고 말합니다. 정말 살고 싶지 않은 생각이 이유 없이 드는데 말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묻습니다. 에스겔 37장 3절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여기에 에스겔은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와 경험을 비추어 본다면, 가능하다고 답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그가 한 답은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입니다.
이것은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인간은 답을 할 수 없다’며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입니다.
성령님의 오심은 인간에게 답이 없음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인간이 답이 있다면 굳이 성령님이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에게 답이 있다면 성령님이 저 멀리서, 저 하늘에서 응원해 주시면 됩니다.
‘파이팅, 잘 해봐’ 이렇게 응원해 주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에 성령님이 오십니다.
로마의 여러 황제 중에서 유대인을 미워한 하드리아누스라는 황제가 있었습니다. 어떤 유대인이 하드리아누스 황제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황제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폐하, 안녕하셨습니까?” 황제는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냐?” 그는 “유대인”이라고 대답하자 황제는 부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 “당장 저놈의 목을 베어라”
이튿날 또 다른 유대인 하나가 황제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황제에게 인사를 하지 않은 채 지나쳤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명령했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저 불경한 놈의 목을 쳐라.”
그러자 옆에 있던 신하가 황제에게 물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어제 인사한 사람을 죽이셨는데, 오늘은 인사를 하지 않은 사람을 또 죽이셨습니다. 도대체 어찌 된 연유입니까?”
황제가 대답합니다.
“내가 한 일은 양쪽이 다 옳다. 그대들은 잘 모르는 일이지만, 나는 유대인을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지!”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행동을 하든 반유대인 이였던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 유대인을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요즘 이렇게 읽힙니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미움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미움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미움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미움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유 없이 우울하고 살고 싶지 않은 이유만으로 자신을 미워합니다.
이런 마른 뼈 경험을 하고 있는 이 땅에, 이 나라에, 우리 삶에 성령님 오셔야 합니다.
그래야 소망이 생깁니다.
성령님 오심은 소망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성령님 오시옵소서.
세번째, 성령님 오심은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세상에서 답답한 일 중 하나는 대화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차라리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성령님의 오심은 단절에서 소통으로 가는 길입니다.
왜 인간에게 단절이 생겼습니까? 다양한 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한 이야기로 들려줍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차이는 에덴동산에서 금지된 나무 열매를 먹을 수 있는것과 없는 것으로 구별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따 먹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 이후에는 사람은 하나님과 같이 이름을 내려고 바벨탑을 쌓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어를 흩으셨고 사람들은 소통에 문제가 생겼고, 서로서로 떠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인간은 대화가 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가 대화법을 공부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 배운 것은
사람은 누구나 오해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앉아서 오해합니다. 가만히 앉아 혼자 생각하는 것이 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결국 불편해 집니다.
그리고 일이 되지 않습니다.
바벨에서 탑을 쌓는 일은 언어가 흩어져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완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젠 약속하신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그전에는 서로서로 알아듣지 못하고 떠난 그들이 알아듣는 관계가 되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8절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들리기 시작하니 관심이 생기고 사랑이 생깁니다
사랑의 시작은 소통에서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들에게 유서를 남겼습니다.
나의 전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줄 것이지만, 아들이 정말 바보가 되기 전에는 유산을 물려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친구가 그 사람에게 이유를 물었습니다.
‘자네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유언을 남겼네. 당신의 아들이 정말 바보가 되지 않은 한 재산을 물려줄 수 없다니,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그러나 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갈대를 입에다 물고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마루 위를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자신의 아들이 자녀를 낳아 그 자녀를 귀여워하면 자신의 전 재산을 상속시키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자녀가 태어나면, 손주 손녀들이 태어나면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는 바보가 됩니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자녀 혹은 손주 손녀에게 자신이 하는 말을 알아들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자녀, 손주 손녀의 눈높이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녀, 손주 손녀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사랑은 소통하게 합니다.
내가 똑똑하게 하나님과 같이 되어 바벨탑을 쌓아야, 여러 어려운 개념을 익히거나 외국어를 능숙하게 말할 수 있어야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 있는 사람보다 자신을 낮추고, 심지어 바보가 되어야 소통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가오신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눈높이로 낮아지셔서 우리와 소통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알려주시고, 그 이름을 부르게 합니다.
사도행전 2장 21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성령님 오심은 이렇게 사랑으로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이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며, 그래서 구원받게 하십니다.
성령님의 오심은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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