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예배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되는 때에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꺾일 것 같지 않던 더위가 물러가는 것처럼 바이러스의 재난이 물러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시편 103편의 말씀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해 다가오시는 하나님 은혜의 영원성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체험한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체험한 하나님은 구원자이시고 긍휼 자비 인자가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은혜 긍휼 자비 인자하심이 연약한 인간을 구원해주시고 공의로 판단해주시고 사랑해 주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가을철 장막절 예배 때에 불렀던 감사 예배시로 하나님의 은혜가 두 가지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유한성에 대조되는 하나님 은혜의 영원성과 그 축복이 강조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은혜의 보편성이 강조되어 다윗 개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자에게 그리고 모든 만물에게 그 은혜가 확장되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자신의 영혼에게 하나님을 송축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 다음은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에게 주신 하나님의 역사를 고백하며 찬양하고(3-18절) 우주 만물로 하여금 만유의 통치자 하나님께 찬송드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자신의 영혼을 향해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 송축하는 마음으로 등장하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가버나움 시몬의 집에 등장한 향유옥합을 깬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를 보느냐’고 하셨습니다.
고대의 식탁 관습에 따르면 식탁에서 비스듬히 발을 뻗고 반 눕는 자세를 취한 상태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예수님의 발치에 접근하기가 쉬웠습니다. 거기서 그 여인은 웁니다. 그런데 여인의 눈물이 예수님의 발에 떨어집니다. 난처한 일이 잇따릅니다. 그 여인은 당황하여 자기의 머리를 풀었습니다. 공개석상에서 머리를 푸는 것은 경멸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에 있는 눈물을 닦는 것입니다. 이러한 접촉을 통해 그녀는 예수님을 부정하게 만든 셈이 됩니다. 그래서 엄격히 말하면 만찬이 더 이상 진전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정하게 됨으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을 부정하게 만든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그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그 일을 전혀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존경의 표시로서 머리에 붓는 향유를 결국 발 위에 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놓아두는 것은 손님을 청한 바리새인 시몬의 눈에는 그가 확실히 예언자가 아님을 증명해 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에 대해 바리새인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 바리새인이 마음속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다정하게 표현해서 시몬에게 눈을 뜰 것을 요청하십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그리하여 그 여자를 올바로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길 바라셨습니다. 시몬이란 이름의 뜻이 ‘들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의 태도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용서의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 용서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그녀에게 이미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떤 계기에 그랬는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더 큰 사랑의 용서를 경험했기에 그래서 그 여인은 이러한 더 큰 사랑의 표현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께 세 가지 결례를 했습니다. 먼저 발 씻을 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환영의 입맞춤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흔한 감람유도 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눈물로 발을 씻었고 계속 발에 입 맞추었고 값비싼 향유를 발에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아주 공공연하게 치유 회복시키고 그 여인 편에 서십니다.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평안히 가라’고 보내는 인사말은 구약 성경에서 유래한 것입니다(삼상1:17,25:35) 이름 없이 등장한 '죄지은 여인'이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첫째로 이 여자를 보느냐! 발에 입 맞추는 이 여자를 보느냐는 것입니다.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님의 발 곁에 서있는 여자입니다.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있습니다. 머리털로 닦습니다. 그 발에 입 맞추고 있습니다. 그 여자의 위치에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죄지은 여자입니다. 그 여인에게는 시편의 고백과 같은 신앙적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이같은 은혜를 경험한 여자였습니다.
예수님 발치에 앉아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신앙입니다. 자신의 무릎에 또는 의자 밑에 얼굴을 묻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보여 주시는 그분의 모습을 보고 갈망의 눈초리로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길에 눈물 뿌리며 주님을 위해 자기 영광을 버린 여인 바로 이 여자를 보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생일대의 만남에서 영적으로 불과 몇 센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주님의 발치에 다가가십시오. 하나님의 얼굴을 보려거든 여인을 따라 예수님의 발치로 가야 합니다. 소중한 찬양과 예배의 옥합을 꺼내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 여기 계신 것입니다. 기름 붓는 도유 이야기는 마태복음 26장6-13, 마가복음 14장 3-9절, 요한복음 12장 1-8절에도 나옵니다. 그러나 누가는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세 복음서에는 예수님 공생애 마지막 주간 직전에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있었던 사건이지만 누가복음에서는 그보다 훨씬 전 예수님의 두 번째 갈릴리 전도여행 중에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내용 전개도 다른데 세 복음서는 메시야에 대한 여인의 신앙과 그의 죽으심을 준비하는 것에 중점이 있는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메시야에 대한 한 여인의 헌신적인 행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죄인에 대한 사랑과 용서에 초점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영적 교만을 자랑하고 죄인인 여인을 멸시하는 바리새인 시몬과 자신의 죄인됨을 뉘우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향유를 붓는 여인의 태도가 대조됩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흉측한 위선의 죄에 빠져 있으므로 영적 문둥병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볼 때 우리는 다 영적 문둥병자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분께 돌아와 감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발 곁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믿음은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이 여인처럼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 감사해서 주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 다가가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여인은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 발 앞에 왔습니다. 받은바 은혜에 대한 감격의 마음으로 말없이 향유를 붓습니다.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아 드립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 발 곁에 서시기 바랍니다. 주님 발 곁에 있는 이 여자를 보느냐. 그 겸손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이 여자를 보느냐! 옥합 깨트려 향유를 붓고 있는 이 여자를 보느냐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오직 주님 중심입니다. 나를 다 깨뜨렸습니다. 예수님을 인생의 중심, 관심의 중심, 무게의 중심으로 삼았다는 말입니다. 중력의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사람 중심이라면 진정한 헌신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중심입니다. 예수님 중심이 아니면 진정한 헌신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어 예수님께 구해주시길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집에 가시려고 하자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눅7:7-8)’ 그 말을 들으신 주님이 그를 놀랍게 여겨 무리에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칭찬 하십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 중심의 한없이 자신을 낮춘 겸손의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7장(24절-30절)에는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인이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자신을 깨뜨리고 오직 주님을 중심하는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처럼 자신을 낮추고 주님만을 높이고 주님만을 중심으로 삼는 믿음입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은 예수님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예수님만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를 깨뜨리고 내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석회질 광석으로 만든 길고 목이 좁은 병인데 이 옥합 자체도 비싼 물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값비싼 것만 넣어두는 것입니다. 목 부분을 깨드려야 사용할 수가 있었기에 옥합을 깨뜨린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자신의 것을 깨뜨립니다. 자기부정의 심정으로 깨어진 마음으로 주님을 향할 때에 우리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옥합을 깨뜨려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임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순간 우리의 삶이 아무리 복잡하고 빡빡할지라도 그분이 오실 공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가장 귀한 보물을 깨뜨려야 합니다. 옥합이 깨질 때 하나님은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실 수 있습니다. 귀한 향유 옥합을 꺼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발아래 그것을 깨뜨리며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세상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겠습니다. 어디든 가겠습니다. 저는 오직 주님만을 원합니다.’ 나의 중심에 주님을 모십니다. 고백하며 가장 귀한 것 드려 경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이 여자를 보느냐! 자기 머리털로 발을 닦고 있는 이 여자를 보느냐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는 데는 겸손이 필요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머리털은 여자의 ‘영광’이었습니다(고전11:15). 마리아는 자신의 영광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은 셈입니다. 예수님 당시 중동의 여자들은 대개 머리를 틀어 올렸습니다. 집을 떠나 공공장소에 갈 때는 두건이나 덮개를 둘렀습니다. ‘히잡’이라고 하고 ‘차도르’ ‘부르카’ 라고도 합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을 씻기 위해 머리털을 풀어야 했습니다. 여자를 보느냐 그 여자는 자기 영광을 ‘버린’ 것입니다. 그 당시 가장 흔한 신발은 발이 훤히 드러나는 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대다수 행인들이 다니는 길에는 낙타며 말이며 당나귀들도 지나다녔기 때문에 동물들의 배설물을 한 번도 밟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샌들은 그런 배설물로부터 발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했고 실내에 들어갈 때 손님들은 문간에서 샌들을 벗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님들의 발에는 여전히 동물 배설물을 포함한 각종 더러움이 남아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손님들의 더러운 발 씻어 주는 일은 집안에서 가장 비천한 종의 몫이었습니다. 손님의 발을 씻는 종이라면 ‘인간 축에도 못 드는 하찮은 소모품 노예’로 통했고 노골적인 멸시를 당했습니다.
이제 이해가 됩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이 여인을 자랑스러워하시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보여 준 행동이 얼마나 겸손한 예배의 모습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털 즉 ‘자기 영광’을 버려 주님 발의 동물 배설물을 닦아 드렸습니다. 우리의 의와 영광은 그분의 발을 닦는 데나 소용되는 더러운 걸레에 지나지 않습니다(사64:6). 당시에는 집에 오는 손님을 정말 모욕하고 천대할 생각이면 종들한테 그의 발을 씻어 주지 못하게 하면 되었습니다. 외형적인 정결함이 전부였던 바리새인의 집에서는 특히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지적하셨듯이 그분이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발을 씻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하긴 했지만 그분을 대우할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배에 하나님의 임재를 원하면서도 마땅히 그분을 예배하지 않거나 무시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는 너무 오래 전부터 하나님을 ‘오시라’고 청해 놓고는 그분을 높은 자리에 모시지 않았습니다. 이는 우리가 진정 원한 것이 심부름꾼을 원한 것이고 그분의 ‘손재주’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신적 치유와 초자연적 선물과 그분이 행하실 수 있는 기적을 원했습니다. 그분 자체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그분을 높일 생각이 없이 예배한다고 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이 여자의 진정한 예배를 보느냐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그 집에 엄연히 초대받은 손님이신 예수님을 주인이 얼마나 불손하게 대했는지 느꼈을 것입니다. 그녀는 그것이 못내 가슴 아팠습니다. 그 슬픔에 마치 수문 열린 댐처럼 눈물이 하염없이 솟구쳤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떨어진 눈물이 하도 많아 글자 그대로 그 물로 그분 발의 더러움을 씻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발에 남아 있는 동물 배설물 찌꺼기는 무엇으로 닦아 낼 것입니까? 그녀는 위신이나 권한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기에 수건을 청할 수 없었습니다. 주인이나 하인이 대령한 수건은커녕 손에 아무것도 없던 마리아는 머리를 풀어 그 ‘영광’으로 주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녀는 주님이 그 집에서 당하신 박대와 공공연한 멸시를 자기가 대신 취했습니다. 그분이 당하신 노골적 거부의 모든 흔적을 아름다운 머리털로 없애고 자신의 것인 양 덮어썼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마음에 어떻게 가 닿았을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다들 보는 데서 주인을 나무라십니다. 자신의 심정을 우리에게 열어 보이셨습니다.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4-47). 주님의 마음이 느껴 지십니까?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 드리는 자기 영광을 주님께 드려 예배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은 이 여자를 보느냐!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붓는 이 여자를 보느냐!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는 이 여자를 보느냐! 주님의 음성 앞에 내가 이 여자를 봅니다. 겸손을 봅니다. 헌신을 봅니다. 자기 영광을 드려 예배함을 봅니다. 고백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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